나여! 백 고무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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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平山申氏壯節公(신숭겸 장군)

나여! 백고무신 2010. 4. 9. 08:00

☞.역사의 숨결 - 춘천 신숭겸 장군  

‘님을 온전케 하온 마음은 하늘 끝까지 미치니/ 넋은 가셨으되 님께서 내려주신 벼슬 또한 대단하구나/ 바라보면 알리라 그때의 두 공신이여/ 오랜 옛날의 일이나 곧은 자취는 나타나는도다’ 이 노래는 고려의 16대 임금인 예종(睿宗)이 태조 왕건을 위해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한 신숭겸과 김락, 두 장군의 충절을 높이 기리기 위해 직접 지어 부른 도이장가(悼二將歌)로 평산신씨장절공유사(平山申氏壯節公遺事)에 기록되어 전한다.

우리나라 4대 명당지로 꼽힌다는 장절공 신숭겸 묘역에 대해서 알아 보았다.

 

의암댐 다리를 건너 오른편 길로 접어들어 10여분 달리면 <장절공 신숭겸 묘역>이라고 쓴 표지판이 나타난다.  묘역은 춘천시 서면 방동리에 있다. 멀리서 바라보니 신장군의 동상이 우뚝 선 뒤편 산등성이에 늙은 소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차 있고 산기슭 오른 쪽 묘지 입구에 높이 세운 홍살문이 보인다.

누구라도 이 묘역을 보면 죽어 묻히고 싶은 욕심이 일어나는 자리라니 그곳이 바로 명당이 아니겠는가.

 

묘역은 뒤로 높은 산을 병풍 삼아 둘러치고 앞으로 뻗어 내린 한 줄기 작은 산봉우리 중턱에 자리 잡은 형국이다.

묘지 입구에서 묘지까지의 거리는 눈짐작으로도 백여 걸음은 족히 넘어 보인다.

봉분은 세 개이며 가운데 봉분 앞에 高麗太師壯節公申崇謙之墓(고려태사장절공신숭겸지묘)라 쓴 비석만 달랑 서 있을 뿐 고관대작들의 묘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석물 하나 없다.

그 까닭은 풍수지리적으로 볼 때 묘역의 주위에 석물을 세우면 명당의 기운을 훼손하기 때문이다.

풍수지리란 음양과 오행, 그리고 주역의 논리를 체계화한 것이라 한다.

 

 

신숭겸(申崇謙)장군은 고려 태조 때의 무장으로 평산신씨(平山申氏)의 시조다. <고려사> 열전에서는 광해주(지금의 춘천) 사람이라고 했으나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전라도 곡성현 출신으로 태조가 평산에서 성씨를 하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춘천도호부 인물조에 그의 이름이 실려 있고 묘가 춘천에 있는 것으로 미뤄보건 데 그는 곡성에서 태어나 춘천에서 살았던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그는 본래 궁예 휘하의 장군이었다. 그러나 궁예가 스스로를 미륵불이라 칭하며 방탕한 생활로 민심을 잃자 배현경, 홍유, 복지겸과 함께 궁예를 폐하고 왕건(王建)을 추대하여 고려를 세운다.

그 후 그는 대장군으로 출전한 공산전투에서 장렬하게 전사한다.

‘공산전투’란 고려 태조 10년(927년)에 공산(지금의 경북 달성군 팔공산)에서 왕건이 이끄는 고려군와 견훤이 이끄는 후백제군이 벌인 전투를 가리킨다. 당시 견훤은 신라의 왕도인 경주를 쳐들어가 경애왕을 죽이고 갖은 만행을 일삼는다.

이에 왕건은 신라를 돕기 위해 친히 정예군 5천 명을 거느리고 공산에서 견훤군을 맞아 싸웠지만 중과부적으로 후백제군에게 포위된다.

전세가 불리해지고 왕건의 목숨이 위태롭자 신숭겸 장군은 태조의 갑옷으로 바꿔 입고 어가를 탄 채 전투를 진두지휘하다가 김락 장군과 함께 장렬하게 전사하게 된다.

이때 왕건은 후백제군의 포위망을 뚫고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며 뒤에 후삼국을 통일하는 위업을 달성하게 된다.

 

 

그 후 왕건은 공산에서 신숭겸의 시신을 수습하여 송악으로 철수한다. 그리고 신장군에게 장절공(壯節公)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후하게 장례를 치렀다. 이를테면 신숭겸 장군은 고려의 개국공신일 뿐만이 아니라 왕건의 목숨을 구함으로써 고려 5백년 사직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고 할 수 있다.

그 후 왕건은 팔관회 때 공산전투에서 전사한 신숭겸과 김락 두 장군이 자리에 함께하지 못함을 크게 애석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두 장군의 충절을 기리고자 짚으로 두 장군의 형상을 만들고 관복을 입혀 연회석에 앉히고는 술과 음식을 바치도록 했다고 한다.

그 이후 고려왕조에서는 팔관회 때마다 두 장군의 형상을 만들어 앉히고 추모하는 것이 하나의 관례가 되었다고 한다.

그로부터 2백 년이 지난 뒤 고려 예종은 서경(지금의 평양)에 행차하여 팔관회를 열었을 때 연회석에 허수아비를 만들어 세운 까닭을 알고는 두 장군은 애도하는 노래를 짓게 되니 바로 ‘도이장가’다.

고려 중기에 불린 이 노래는 이두로 표기된 향가의 잔존형식으로 창작연대와 창작 동기가 밝혀져 있어 문학사적으로 매우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묘역에는 조선조 순조 때의 세도가였던 김조순이 짓고 명필가인 신위가 쓴 장절공신도비가 서 있다. 신도비에는 장절공의 묘에 봉분이 세 개인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공산전투에서 신숭겸 장군이 전사하자 후백제군은 왕건의 시신으로 알고 목을 베어갔다.

태조 왕건은 순금으로 장군의 머리를 만들어 시신과 함께 매장하고 도굴을 방지하기 위하여 춘천과 구월산, 팔공산 세 곳에 똑같은 묘를 만들었으며, 춘천 묘역에는 시신 묻은 곳을 분간할 수 없도록 봉분을 세 개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머지 두 개의 봉분이 신숭겸 장군 부인들의 묘라는 설도 있으니 신도비에서도 무엇이 진실인지 그 여부를 알 수 없다고 적고 있다.

아무려면 어떤가. 사람들이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시신과 함께 매장했다는 황금머리가 아니라 임금을 위해 스스로 목숨을 바친 장군의 충절이 아니겠는가. 태조 왕건은 신숭겸 장군의 넋을 기리기 위해 지묘사(智妙寺)라는 절을 지어 그의 명복을 빌게 했다고 하니 장군의 죽음을 얼마나 애통해 했는지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뒤 성종 때 신숭겸 장군은 태사(太師)로 추증되어 태조 묘정에 배향된다. 그리고 현재 그의 묘역은 강원도 기념물 21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무릇 그의 충절을 기리는 일들이 이러할진대 혹여 황금에 눈이 먼 사람들이 도굴을 꾀한다 하더라도 동티가 날 것임이 분명하다.

 

 

묘역을 둘러보니 평산 신씨 문중의 성역화 사업으로 인하여 사당, 영정각, 신도비각, 기념관, 재실, 연못 등이 잘 단장돼 있다. 그리고 그곳에 머물러 있는 짧은 시간에도 묘역을 참배하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신숭겸 장군의 충절이야말로 만고의 귀감이 아니겠는가. 참배를 마치고 돌아가는 그들의 결연한 표정에서 장절공의 우국충정을 읽을 수 있었다.

☞.대구 동구 지묘동에 위치한 사적들 : 

파계사 방면으로 401번 버스가 지나다가, 파군재 삼거리에서 파계사쪽으로 120여m쯤 가면 조그만 지묘교 다리가 보인다. 다리 건너 우측 동화천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면 우뚝 솟은 홍살문이 이곳이 유적지임을 알려준다.

또한, 뒤편으로 가는 길은 104, 105, 131번을 타고 파군재 삼거리를 지나 동화사쪽 방향 첫번째 지나면 우뚝 솟은 왕산 아래 고가(古家)의 기와채가 산자락 아래 옹기종기 널려있다.

제일 위채가 표충사(表忠祠)로 위패와 함께 신숭겸 장군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호피가죽 위에 큰칼을 짚고 떡 버티어 서있는 몸집이 장대한 장군의 영정을 보면 그 당시 위풍과 기상을 한눈에 느낄 수 있다. 홍살문 뒤로 있는 신숭겸 장군 순절단은 태조 10년(927년) 후백제의 견훤이 신라를 공격하여 경애왕을 죽이고 약탈을 자행하자 태조 왕건이 군사를 이끌고 공산동수(公山桐數:지금의 동화사)에서 견훤을 맞아 싸웠으나, 의외로 싸움은 대패하여 왕건이 위험에 처하자 왕건의 옷을 바꾸어 입고 왕을 피신시킨 후 싸우다 전사한 자리이다.

후일 태조는 장군의 죽음을 애통히 여겨 그의 시신을 거두어 광양주(지금의 춘천)에 예장하고 이곳에 피묻은 흙, 의복 등을 수습하여 그가 전사한 자리에 혈단으로 쌓은 것이 순절단인데, 일명 표충단이라고도 한다.

그 후 1819년 신의직에 의해 묵은 제단을 중수하고 고려장절 신공순 절지지"(高麗壯節 申公殉 節之地)라 새겨진 순절비를 건립하였다.

 

 

단소(壇所) 내에는 여름이면 400년 정도의 수령을 가진 백일홍 고목이 단(壇)주위를 에워싸 만발한 꽃은 역사의 덧 없음과 함께 아늑하고 포근함마저 느끼게 한다. 한편 영정을 모신 표충사 옆 충렬비각에는 용머리에 거북받침으로 건립한 장절공 행적비인 충렬비가 세워져 있는데 그 오랜 풍상 속에서도 찡그리지 않고 해학적으로 웃고있는 거북의 모습은 매우 이채롭게 느껴진다.

 

고려태사 장절공 신숭겸 장군의 유적은 지난 74년 대구광역시 기념물로 지정, 장절공의 충절을 기리는 위패(位牌)와 영정(影幀)이 모셔져 있으며, 순절단(殉節壇)과 충렬비(忠烈碑)등이 있다. 현재는 초·중등학교의 학습과 방학 때면 문화 유적 순례지로 학생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

 

옛날에는 이 일대가 오동나무 숲으로 덮혀 있으며, 이곳이 공산전투의 최대 격전지였다 한다. 이곳 주변에는 왕건과 관련된 지명이나 재미나는 전설이 많이 전혀 내려오고 있다. 예를 들면, 왕건이 공산 전투에서 그의 군사들이 크게 패했다는 파군(破軍)재, 지묘동 뒷산에 피신하여 잠시 휴식을 취해 "왕건을 살렸다"는 뜻에서 왕산(王山), 도주하다 이 지역에 이르자 어른들은 피난 가고 어린아이들만이 남아있어 불로동(不老洞), 겨우 위험을 피해 이곳에서 한숨을 돌리고 찌푸린 얼굴을 활짝 폈다는 해안(解顔), 도주 중 날은 반야이고, 중천에 달이 떠 있어 탈출로를 비췄다고 해서 반야월(半夜月), 이 지역에 도달하여 안심했다는 안심(安心) 등의 유래가 있다.(대구 동구청 자료)

 

 

☞.평산 신씨에 대해서

평산은 황해도 남동쪽에 위치한 고을의 지명으로, 본래 고구려 때 대곡군(大谷郡) 또는 다화홀(多和忽)이었다.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영풍(永豊)으로 이름을 고쳤으며, 고려 초에 평주(平州)로 바뀌었다. 서기 1272(원종 13)년 복흥군(復興郡)에 합쳐졌다가, 충렬왕(忠烈王) 때 다시 복구되었다.  조선 시대에 들어와 서기 1413(태종 13)년에 평산으로 바뀐 뒤, 도호부(都護府)로 승격되었다.  고종 32(서기 1895)년에 군으로 다시 격하되었다.

평산 신씨의 시조는 고려의 개국공신으로 벽상공신삼중대광태사(壁上功臣三重大匡太師)에 오른 신숭겸이다. 그의 초명(初名)은 능산(能山)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본래 전라도 곡성현 출신으로 태조가 평산에서 사성(賜姓)하였다고 한다.  또 『고려사(高麗史)』 열전(列傳)에는 그를 지금의 춘천지방인 광해주(光海州)사람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신증동국여지승람』 춘천도호부 인물조에 신숭겸의 이름이 실려 있고, 또한 그의 묘가 춘천에 있다.  이로 미루어보면, 그는 본래 곡성 출신으로 뒤에 춘천에 옮겨와 살게 되어, 묘도 춘천에 쓰게 된 것으로 보인다.

신숭겸은 몸집이 장대하고 무용(武勇)이 뛰어났는데, 처음에는 궁예가 세운 태봉의 기장(騎將)으로 있었다.  고려 태조 원년이던 서기 918년에 배현경(裵玄慶)·홍유(洪儒)·복지겸(卜智謙) 등과 더불어 궁예(弓裔)를 폐하고 왕건(王建)을 추대해 고려가 창업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에 고려개국원훈(高麗開國元勳)으로 대장군(大將軍)에 올랐다.

어느 날 왕건이 평산으로 사냥을 나가 삼탄(三灘)을 지날 때이다.  마침 높은 하늘을 나르는 세 마리의 기러기를 보고, 왕건이 수행하는 여러 장수들에게 물었다.  "누가 저 기러기를 쏘아 맞추겠는가?" 신숭겸이 맞추겠다고 아뢰었다.  왕건이 그에게 궁시(弓矢)와 안마(鞍馬)를 내리며 쏘라고 하였다. 그는 "몇 번째 기러기를 쏘리이까?" 하고 물었다.  왕건이 웃으며 말했다.  "세 번째 기러기 왼쪽 날개를 쏘라!"

신숭겸이 과연 세 번째 기러기의 왼쪽 날개를 명중시켜 떨어뜨리자, 왕건이 탄복을 하였다.  그리고 기러기가 날던 땅 3백 결을 하사하고, 본관을 평산으로 삼도록 하였다.

서기 927년 후백제는 군사를 이끌고 경주를 침범했다. 그러자 왕건은 신라를 도와 후백제과 싸우게 되었다. 왕건은 신숭겸과 정예병 5천명을 거느리고 후백제를 공격하였다.

드디어 고려와 후백제군이 오늘날의 팔공산인 공산의 미리사 부근에서 부딪쳤다. 병력이 열세였던 고려군은 대패하고 말았다. 왕건과 휘하의 장수들은 후백제군의 포위망을 뚫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웠다. 그러나 허사였다. 마침내 신숭겸은 국가의 장래를 위해, 태조 왕건과 자신의 외양이 닮은 점을 이용했다. 그래서 서로 갑옷을 바꿔 입고 태조를 탈출시킨 후, 스스로 적진을 향해 돌격했다. 후백제군은 신숭겸을 태조로 오인해 집중 공격을 가했다. 원보(元甫)·김락(金樂)과 같이 힘을 합쳐 싸우다가 신숭겸이 장렬히 전사하자, 후백제군은 그의 목을 베어갔다.

평소 아우로 아끼던 신숭겸의 죽음을 슬퍼한 태조는 시신을 잘 보살펴 춘천에 예장하고, 벽상호기위태사개국공삼중대광의경대광위이보지절저정공신(壁上虎騎衛太師開國公三重大匡毅景戴匡衛怡輔砥節底定功臣)에 추봉하였다.  그리고 그의 아들 능길(能吉)과 보(甫)를 원윤(元尹)으로 삼고, 지금의 경북 달성군 공산면 지묘동에 지묘사(智妙寺)를 세워 명복을 빌었다.

이때 태조 왕건은 신숭겸의 공을 기려 후백제군이 베어간 그의 머리 대신에 순금으로 시신의 머리를 만들어 후하게 장례를 지냈다. 그리고 금으로 만들어진 그의 머리가 도굴될 것이 염려스러워 춘천, 구월산, 팔공산에 똑같은 묘를 만들게 했다고 전해진다.

특히 춘천의 서면 방동리의 묘역은 도선(道詵) 국사가 왕건을 위해 잡아준 자리였다고 한다. 그러나 왕건은 자신을 위해 기꺼이 죽음을 택한 신숭겸의 절의에 감동하여 그 자리를 선뜻 내주었다는 것이다. 특히 여기에는 똑 같은 봉분을 세 기나 나란히 만들어, 어느 것이 진짜 무덤인지 알 수 없도록 하였다.

신숭겸의 충절은 고려는 물론 조선시대까지 높이 기려졌다. 서기 1120년에는 고려의 예종이 서경(西京)에 행차해 팔관회를 주도하는 과정에서 「도이장가(悼二將歌)」를 지어, 김낙과 신숭겸의 공을 노래한 일이 있다.

평산 신씨는 조선시대 후반기에 세를 떨친 명문으로 상신(相臣) 8명, 대제학 2명, 공신 11명, 문과 급제자 186명을 배출하였다. 파계는 시조의 14대손에서 20개파로 나뉘었는데, 그 가운데 문희공파(文僖公派), 정언공파(正言公派), 사간공파(思簡公派)에서 많은 인물이 나왔다. 문희공파의 파조(派祖)는 신개이고, 정언공파와 사간공파의 파조는 신효(申曉)와 신호(申浩)이다.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맥을 살펴보면, 시조 신숭겸의 11세손 연(衍)의 아들 중명(仲明)은 도관(都官)을 지내고 병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자명(自明)은 봉익대부로 춘천부사를 역임하였으며, 헌주(憲周) 상호군을 역임하였다.  삼형제의 출현으로, 평산 신씨의 가세가 크게 융성하여 명문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중명의 아들 집평(執平)은 고려조에서 전리판서(典理判事)와 수문전대제학(修文殿大提學)을 지냈다.  그의 아우 군평(君平)은 공민왕 때 좌대언(左代言)과 어사대부(御史大夫)에 올라, 당대에 대학자로 추앙되었던 막내 현(賢)과 함께 명성을 떨쳤다.

집평의 셋째 아들 안(晏)은 고려 말에 봉선고판관(奉先庫判官)을 거쳐 종부시령(宗簿寺令)에 이르렀으나, 고려가 망하자 평산의 황의산에 들어가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지켰다. 그의 아들 개( )가 뛰어났다.

개는 국초 이래 명간관(名諫官)이라고 태종이 극찬했다. 태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檢閱)을 지내고, 태종 때 이조 정랑(吏曹正郎)·참의(參議)·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 등을 거쳤다. 세종 때는 이조판서가 되어 북변을 자주 침입하던 오랑캐 토벌에 공을 세웠다. 그 후 우참찬(右參贊)으로 『고려사』의 수찬에 참여했으며, 좌찬성과 우의정을 거쳐 궤장을 하사 받고 기로소에 들어갔다. 서기 1447(세종 29)년 좌의정에 올랐다.

본래 왕조의 기록인 실록(實錄)은 왕이 보는 것을 금하였다. 객관성이 흐려지고 왕의 세력에 좌우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어느 날 태조가 자신에 관한 기록이 궁금하여 실록을 보여 줄 것을 하명하였다. 이에 개는 완강히 거부하였다. 이 일은 뒷날 실록 열람을 원하는 임금들의 명을 거부하는 좋은 전례가 되었다. 그의 아들 자준(自準)은 관찰사를 역임하였고, 자승(自繩)은 대사성을 역임하였으며, 자형(自衡)은 집의를 역임하였다. 이들 삼형제는 후대에 훌륭한 인재를 많이 두어, 평산 신씨의 중추적인 인물이 되었다.

개의 아우로 태종 때 문과에 장원 급제한 효(曉)는 사간원우정언(司諫院右正言)을 거쳐, 세종 때 교수관(敎授官)을 지냈다. 그의 아들 영(瑛)은 김식(金湜)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는데, 중종 때 수원부사(水原府使)로 나가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의 추앙을 받았다.

군평(君平)의 손자로, 공양왕 때 지신사(知申事)를 역임한 호(浩)는 고려의 국운이 기울자 옥새를 부둥켜안고 이성계 일당에 항거했으나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고향인 평산으로 내려가 은거하였다. 태조가 전리판사(典理判事)의 벼슬을 내려주면서 수차에 걸쳐 조정으로 불렀으나, 응하지 않았다.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성균관 유생(儒生) 1천 여 명을 이끌고 대궐에 들어가 조광조(趙光祖)의 구명을 상소했던 명인(命仁)은 항상 울분을 품고 `풍류광객(風流狂客)`이라 자칭하며, 전국을 방랑하였다. 거창에 은거하던 스승 김식이 자결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달려가 시신을 거두어 충주에 장례를 지냈다.

당시에는 김식이란 이름만 입에만 올려도 역적으로 몰리던 때였는데, 그의 시신을 운반했던 명인의 용기에 세상 사람들은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장례 도중에는 「조송옥사(弔宋玉辭)」라는 애도시를 지어 자기의 뜻을 밝히고, 다시는 벼슬길에 나가지 않은 채 시주(詩酒)로 일생을 마쳤다.

명인의 아들 익(翌)은 명종 때 무과에 급제하여 함평현감(咸平縣監)으로 나가 치적을 쌓았다. 선조 때 제주목사(濟州牧使)·전라도병마절도사(全羅道兵馬節度使)·순천부사(順天府使) 등을 역임하였다.

익은 본래 남대문 밖 청파의 배다리 근처에 살았다. 하루는 그이 아버지 명인이 집 근처에서 길 건너 사람과 이야기를 하다가 당시 병조 판서 류전(柳琠)의 행차를 범하여 길잡이하는 하인에게 끌려가 곤욕을 당했다. 익은 모르고서 범한 일인데 너무 지나치게 욕을 보였다고 하여, 하인을 번쩍 들어 도랑에 내던졌다.

소란을 보고 있던 류전은 익을 장하게 보고는, 임금에게 대장부 하나를 발견했다고 아뢰었다. 이에 선전관(宣傳官)에 특채되었는데, 명종이 서교(西郊)에 나갔을 때이다. 거센 돌풍으로 어막(御幕)의 끈이 끊어졌는데, 익은 그 끈을 붙잡아 어막이 넘어지지 않도록 혼자 버티고 있었다고 한다.

개의 증손인 상은 어려서부터 성리학을 연구하여 조광조·이자와 더불어 뜻을 같이했으나, 그들의 과도한 혁신정치에 저항을 느껴 중도사상을 지녔다.  중후한 인격으로 추앙을 받았다. 일찍이 평안감사(平安監司)가 되었는데, 평산부(平山府)의 아관(衙官)을 지날 때는 본관 마을이라 하여 수레에서 내려 걸어갔다고 한다.

선조 때 명장으로 유명했던 립(砬)은 상의 손자이다. 서기 1583(선조 16)년 온성부사(穩城府使)가 되어 북면에 침입해 온 이탕개(尼湯介)를 격퇴시키고, 두만강을 건너 야인들의 소굴을 소탕하고 개선하였다. 선조 임금은 교외에까지 직접 마중을 나가, 전포에 핏자국이 나 있는 것을 보고 어의를 벗어주었다. 그리고 장군에게 혼기에 닥친 딸이 있는 것을 알고는, 자신의 넷째 아들 신성군(信城君)의 아내로 삼아주는 등 극진히 대해주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손수 립을 불러 보검을 내리며 왜군의 토벌을 당부하였다. 빈약한 병력으로 출전한 그는 충주의 탄금대(彈琴臺)에 배수진을 치고 적군과 대결하다 참패하자, 부하장 김여물(金汝 )과 함께 강물에 투신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립의 아들 3형제 중 장남 경진(景 )은 혼탁한 광해군의 난정을 개탄하고 인조반정(仁祖反正)을 주도해 공을 세웠다. 정사일등공신(靖社一等功臣)에 책록되었다. 나중에는 공조참의와 병조참판을 거쳐 병조판서에 올라, 훈련(訓鍊)·호위(扈衛)·포도(捕盜)의 3대장을 겸했다. 병자호란(丙子胡亂) 때에는 남한산성의 수비를 담당하였다.

특히 그는 `아버지가 투신해서 죽은 강의 물고기를 어찌 먹을 수 있겠느냐?` 하면서, 평생동안 물고기를 먹지 않았다고 한다. 우의정·좌의정을 거쳐 평성부원군(平城府院君)에 봉해지고, 영의정에 이르렀다. 정사이등공신(靖社二等功臣)에 봉해진 아우 경유(景裕), 동성군(東城君) 경인(景 )과 함께 의리와 절개의 무맥(武脈)을 이었다.

19세손인 개성도사(開城都事) 승서(承緖)의 아들 흠(欽)은 인조 때 영의정에 올라 정주학자(程朱學者)로 문명을 떨쳤다. 오늘날에도 이정구(李廷龜), 장유(張維), 이식(李植)과 더불어 조선 전기 4대 고문가(古文家)로 제일 먼저 꼽힌다. 글씨에도 일가를 이루어, 아우 감(鑑)과 함께 가문을 빛냈다.

인조로부터 `신하가 모두 이 사람 같으면 걱정이 없겠다!`고 칭찬을 받았던 감은 용양위부사직(龍 衛副司直)겸 춘추관기주관(春秋官記注官)이 되어, 앞서 임진왜란에 불타 없어진 『왕조실록』의 재간(再刊)에 참여했다. 남원부사(南原府使)와 강화부유수(江華府留守)를 역임했다.

흠의 아들 21세손 익성(翊聖)은 선조의 딸 정숙옹주(貞淑翁主)와 혼인하여 동양위(東陽尉)에 봉해지고, 광해군 때 폐모론을 반대하다가 초야로 쫒겨났다. 인조반정 후에 재등용되어,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으로 왕을 호종하여 청군(靑軍)과 계속 싸울 것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화의(和議)가 성립된 후에도 계속 척화를 주장한 `척화오신(斥和五臣)`중의 한 사람으로, 심양(瀋陽)에 붙잡혀 갔다.

흠의 손자이자, 익성의 아들인 최(最)는 효종(孝宗) 때 봉교(奉敎)로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을 겸하여 『인조실록(仁祖實錄)』 편찬에 참여했다. 문장에 능하여, 『해동사부(海東辭賦)』에 시부(詩賦)가 전한다.

흠의 손자이자, 참판 익전(翊全)의 아들인 정(晸)은 현종 때 춘당대문과(春塘臺文科)에 급제하여, 대사간을 거쳐 대사성을 역임했다. 숙종 때 좌우참찬(左右參贊)과 예조판서(禮曹判書)·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등을 지냈다. 시문(詩文)에 능하고 글씨에 뛰어났다.

흠의 손자이자, 익륭(翊隆)의 아들인 만(曼)은 17세 때 병자호란을 당하여 부모와 처를 데리고 강화(江華)에 피난을 갔다. 그 곳에서 어머니와 처 홍씨(洪氏)가 해를 입고 죽자 그 울분과 치욕을 가눌 길 없어 자결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아버지가 살아계신 까닭에 차마 죽지 못하고 있었는데, 난이 평정되었다.

그는 치욕을 몸에 입고는 한양의 성문 안으로 들어 설 수 없다고 하면서, 회덕(懷德)의 송촌(宋村)으로 송시열(宋時烈)을 찾아가 학업을 닦았다. 그리고는 부안(扶安)의 백연동(白蓮洞)과 진잠(鎭岑)의 구봉산(九峰山)에서 야인생활을 지속하였다. 뒷날 송시열이 입조(入朝)하여 나라의 중요한 기획에 만의 지혜를 참작하고자 여러 번 불렀으나, 도성 안에는 발을 들여놓지 않으면서 서신으로 정사에 참여했다.

전국 각처에 흩어진 학자들을 찾아 방랑하고 명소마다 찾아가 놀면서도 국정에 참여했으므로, `야인판서(野人判書)`로 불리었다. 그는 임종 때에도 `왜놈과 한 하늘에 살다 죽으니 지하에 가서 선친에게 고할 말이 없다`고 원통해하며 숨졌다고 한다.

철저한 배청숭명주의자인 민일(敏一)의 아들 상(尙)은 병자호란 때 왕족의 호위직을 맡아 강화도에 피난을 갔다. 적이 임박해오자 호위하던 신하들이 모두 도망갔는데도, 그는 혼자 세자빈을 지키고 있었다.

이 때 청병이 세자빈에게 접근하여 그들의 장군에게 배례시킴으로써 굴복의 예를 갖추도록 강요하였다. 표정 하나 흩트리지 않고 서있던 그는 세자빈의 시종에게 화구를 달구어 오라고 시켰다. 그리고 그것을 세자빈이 타고 있던 가마 속에 넣어주며 자결을 권하였다. 세자빈의 죽음을 확인한 다음, 자신도 뒤따라 자결할 작정이었다. 이 땅의 많은 부녀자들의 자결을 보아온 청병은 이에 겁을 먹고 굴욕 배례를 단념하였다. 그리고는 그저 신변만을 보호토록 하였다.

전쟁이 끝난 뒤, 정적들은 세지빈을 구제해낸 상에게 세자빈에게 죽음을 강요했다는 모략까지 곁들여 죄를 뒤집어씌우려 하였다. 상은 스스로 유배길을 택하여 원주로 내려가 초가 두 칸을 짓고 사람의 내왕을 사절했다. 그는 원주에서 『부음록』3권과 『휘언』두 편을 저술하여 후손에게 전했다고 한다. 상의 아들 명규(命圭)는 현종 때 집의를 역임하였는데, 직간(直諫)으로 당대 백성들의 속을 후련하게 했다고 한다.

그리고 예학의 거두였던 석학(碩學) 박세채(朴世采)에게 학문을 연마하여 서인으로서 숙종 때 대사헌(大司憲)에 올랐던 완(玩)이 있다. 그는 이조판서를 거친 뒤, 우의정(右議政)에 올랐다. 희빈(희嬪) 장씨(張氏)의 처벌을 주장했고 북한산성의 축조를 건의하여 왕의 승낙을 받았으나, 일부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영의정에 올라 평천군(平川君)에 봉해졌다.

영조 때 알성문과에 급제했던 만(晩)은 정자(正字)를 거쳐 실록청도청낭청(實錄廳都廳郎廳)이 되었다가, 정미환국(丁未換局)으로 소론이 득세하자 파직을 당했다. 다시 등용되어 이조(吏曹)와 호조(戶曹)의 판서를 역임하면서, 편수당상(編修堂上)으로 『천의소감』을 편찬했다.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을 지내고, 영중추부사(領中樞府使)에 이르렀다. 역시 영의정을 역임하고 기로소에 들어간 아우 회(晦)와 함께 가문을 대표했다.

그 밖의 인물로는, 숙종 때 봉상시첨정(奉常寺僉正)을 지내고 문장과 시문에 탁월했던 유한(維翰)과 영조 때 대사헌을 역임한 위(暐)가 유명했다. 어영대장(御榮大將)을 거쳐 공조참판을 지낸 대겸(大謙)과 청아한 문장과 서예로 명망이 높았던 작(綽)은 시서화에 능하여, 지금까지도 시서화 삼절(三絶)로 추앙받는 위(緯)와 함께 이름을 날렸다.

판관(判官) 광온(光蘊)의 아들 재식(在植)은 헌종 때 대제학을 역임하였다. 고종 때 지중추원사(知中樞院使)에 오른 명순(命淳), 좌의정 응조(應祖), 판삼군부사(判三軍府使) 헌(櫶), 판소리 대가 재효(在孝), 임오군란의 책임을 지고 임자도에 위리안치 되었던 정희(正熙), 비서원승(秘書院丞)과 동지돈령원사(同知敦零院事)를 지낸 두선(斗善), 대동학회장과 수학원장을 역임한 기선(箕善), 영남지방의 의병장으로 활약한 돌석(乭錫), 경북 의용단장 태식(泰植) 등이 명문의 가통을 지켰다.

한말에 와서 특히 가문을 빛낸 인물로 독립군 양성에 전력했던 팔균(八均)이 있는데, 토비의 습격을 받고 순절했다. 3·1절 기념방송 사건과 반동비밀결사의 고문으로 추대되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복역중 6·25 때 총살당한 석구(錫九)이외에도, 곡성 출신의 의병 정백(正栢), 내장사에서 재기를 도모하다가 사형 당한 덕균(德均), 광복회 초대회장 덕영(德永),『심경』이란 잡지를 발간하여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현구(鉉九), 광복군 참리부 내무사랑 우현(禹鉉)이 근대의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그리고 제헌국회의원에 당선되어 초대 부의장(副議長)을 지내고 민주국민당(民主國民黨) 최고위원과 민주당 대표최고위원으로 야당을 영도했던 익희(翼熙)가 있다. 그는 자유당 독재치하에 민주당 공천으로 대통령(大統領)에 출마하여 명문 평산 신씨의 가문을 더욱 빛냈다.

묘역의 상단에는 봉분 세 기가 가지런하다. 뒤로는 곡장이 크게 둘리었다. 비의 전면에는 `고려태사장절공신숭겸지묘`라고 쓰였다. 묘역은 서기 1976년에 강원도지방문화재 29호로 등록되었다.

더위에 지친 회원들이 묘역 뒷편의 곡장 아래 드리워진 그늘에 앉는다. 그리고 흐르는 땀을 닦으면서 전방을 구경한다. 통쾌하달 만큼 시원한 전방이다. 상쾌한 솔바람이 불어온다.

회원들이 앉아 쉬는 곳이 입수도두처이다. 두두룩하게 솟아서 용이 지닌 힘과 크기를 자랑하고 있다.

삼각봉인 북배산에서 내려온 용이니, 이곳의 혈은 유두혈로 분류된다. 곡장 뒤로 넘겨보면, 경사 40°가 넘을 정도로 몹씨 급하게 서둘러 내려온 용이다. 그러나 곡장에서부터는 여유만만하게 흘러내렸다. 그리고는 젖가슴 같은 묘역을 펼쳤다.

청룡과 백호는 모두 본신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청룡은 조금 거리를 둔 채 묘역을 감싸면서 전방의 논에까지 내려왔다. 백호는 바짝 붙어 급히 내려와 제각 즈음에 머물렀다.

지금도 무지하게 큰 명당이다. 좌우의 시야를 가리는 송림이 없다고 간주하면, 이를 데 없이 큰 명당이다. 그런데도 평탄하고 아늑한 모습이다. 논으로 이루어진 명당의 오른켠이 마을이다. 태평스런 농촌의 모습이다.

명당 끝으로는, 바깥 청룡과 백호가 만나는 수구처가 보인다. 두 산자락이 겹쳐서 꼭꼭 막은 교쇄의 형국이다. 명당 안에 그득 담긴 상서로운 기운이 전혀 빠져나갈 수 없다.

수구처 너머에 춘천 시가지가 보인다. 얼마나 큰 외명당인지, 춘천 시가지를 품에 안았다. 왼쪽으로 봉의산이 보인다. 시가지 뒤로는 오대산에서 봉의산으로 내려오는 장엄한 산세의 흐름이 보인다.

돌아보면, 주변의 산세들 역시 다소곳한 모습으로 묘역을 향해 다가들고 있다. 재상을 낳는다는 일자문성(一字文星)의 형상을 한 산들이 많다. 그런데 자세히 살피면 다섯 종류의 산세가 모두 보인다. 파도로 출렁이는 수성체(水星體), 불길로 타오르는 화성체(火星體), 뾰족한 목성체(木星體), 둥그스름한 금성체(金星體), 밋밋한 토성체(土星體) 등 오성체(五星體)가 골고루 찾아진다.

제왕의 자리가 되기 위해서, 오성체의 완비는 중요한 요건이다. 따라서 사격(砂格)이나 여러 가지 입지조건으로 보아, 태조 왕건이 자신의 신후지지(身後之地)로 찍어둔 이곳을 신숭겸 장군에게 사패지(賜牌地)로 내려주었다는 이야기는 상당한 신빙성을 지닌다.

이곳의 정확한 안산은 찾기가 힘들다. 도굴 방지책으로 세 봉분 중에 어느 곳이 진혈인지 알아낼 수 없도록 교묘하게 묘역을 꾸몄기 때문이다. 몇몇 회원들이 장난삼아 엘 로드를 꺼내 혈을 측정해본다. 동쪽의 봉분이 자리란다.

하나씩 살펴보면, 동쪽의 봉분은 바깥 백호의 끝단에 솟은 귀인봉을 안산으로 삼았다. 가운데 봉분은 봉의산 뒤쪽 멀리에 솟은 귀인봉이 안산이다. 서쪽 봉분은 봉의산이 안산이다.

향은 세 봉분 모두 대체로 술좌진향(戌坐辰向)이다. 물은 좌수도우(左水到右)해서 손사방(巽巳方)으로 빠진다. 88향법 가운데 정묘향(正墓向)에 속하는 향법이다.

정묘향은 좌수도우하고 우측에서 작은 물이 나와 양수협출(兩水陜出)해야 하며, 곤신파(坤申破)에 정미향(丁未向), 건해파(乾亥破)에 신술향(辛戌向), 간인파(艮寅破)에 계축향(癸丑向), 손사파(巽巳破)에 을진향(乙辰向)이 이에 속한다. 정묘향은 부귀를 불러오며, 자손들이 번창하고 건강 장수를 한다는 향이다.

 

☞.平山 申氏 항렬표

밀직공파, 봉상윤공파, 장령공파, 현령공파, 문희공파, 정언공파, 한성윤공파, 사간공파, 대제학공파, 온수감공파, 제정공파, 전서공파, 이상공파, 판사공파, 진사공파, 감찰공파, 판윤공파, 침판공파, 군수공파,

27세 : 광(光), 언(彦), 악(岳), 응(應), 일변(日邊)

28세 : 주(柱), 종(宗), 범(範), 성(成), 광(匡), 종(宗), 문(文)

29세 : 대(大), 석(錫), 영(泳), 명(命), 동(東), 선(善), 재(在)

30세 : 주(周), 한(韓), 상(相), 영(永), 진(鎭), 목변(木邊)

         (31세 이전에는 파별로 따로 쓰였으나 이후에는 같이 쓰인다.)

31세 : 의(義), 환(煥), 희(熙), 수(秀), 태(泰),

32세 : 균(均), 규(圭), 노(老), 곤(坤),현(鉉), 언(彦), 윤(允), 종(鍾), 철(澈), 식(湜), 순(淳), 영(泳)

33세 : 현(鉉), 언(彦), 윤(允), 종(鍾),,,,,,,,

34세 : 철(澈), 식(湜), 순(淳), 영(泳),,,,,,,,

35세 : 동(東), 상(相), 영(榮), 주(柱),,,,,,,,

36세 : 섭(燮), 용(容), 항(恒), 한(煥),,,,,,,,

37세 : 재(載), 숙(璹), 기(基), 배(培),,,,,,,,

38세 : 호(鎬), 진(鎭), 익(謚), 련(鍊),,,,,,,,

39세 : 제(濟), 로(濬), 원(源), 홍(洪),,,,,,,,

40세 : 근(根), 화(和), 병(秉), 집(集), 성(性), 충(忠), 찬(燦), 덕(德), 용(用), 익(翼), 중(重), 식(軾), 원(元), 완(完), 극(棘), 욱(旭), 필(弼), 우(雨), 남(南), 설(卨), 단(段), 승(承), 제(齊), 녕(寧), 무(武), 빈(斌), 성(成), 무(茂), 홍(弘), 세(世), 경(卿), 기(起), 염(廉), 용(庸), 경(慶), 강(康), 재(宰), 화(華), 상(常), 행(幸)

41세 : 성(性), 충(充), 찬(燦), 덕(德),,,,,,

42세 : 용(用), 익(翼), 중(重), 식(軾),,,,,

43세 : 원(元), 완(完), 극(棘), 욱(旭),,,,,,

44세 : 필(弼), 우(雨), 남(南), 설(卨)

45세 : 단(段), 승(承), 제(齊), 녕(寧),,,,,,

46세 : 무(武), 빈(斌), 성(成), 무(茂)

47세 : 홍(弘), 세(世), 경(卿), 기(起),,,,,,

48세 : 염(廉), 용(庸), 경(慶), 강(康)

49세 : 재(宰), 화(華), 상(常), 행(幸),,,,,,

50세 : 정(廷), 승(升), 연(延), 성(聖),

51세 : 규(揆), 등(登), 계(癸), 봉(奉)

 

五行相生法(오행상생법) 항렬자를 씁니다. 오행의 근본인 金·水·木·火·土 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