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여! 백 고무신

♬.마이산 [馬耳山] / 높이 : 685m, 678m, 본문

체력은국력/300대 명산

♬.마이산 [馬耳山] / 높이 : 685m, 678m,

나여! 백고무신 2016. 5. 30. 08:14

마이산 [馬耳山] / 높이 : 685m, 678m, 

일시 :2016/05/29

들머리(위치) : 진안군 마령면 동촌리 76-2 (남부주차장)

특징, 볼거리 : 마이산(馬耳山)은 두번째 산행으로 두 암봉이 나란히 솟은 형상이 말의 귀와 흡사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동쪽 봉우리가 숫마이봉, 서쪽 봉우리가 암마이봉으로 부른다.  또한 부부봉으로 부르기도 하여 봄에는 돛대봉, 여름에는 용각봉, 가을에는 마미봉, 겨울에는 문필봉으로 부르기도 한다.

중생대 말기인 백악기 때 지층이 갈라지면서 두 봉우리가 솟은 것이라고 하는데. 숫마이봉과 암마이봉 사이의 448 층계를 오르면 숫마이봉 중턱의 화암굴에서 맛있는 약수가 끈임 없이 솟아 오른다.

두 암봉 사이에 낀 마루턱에서 반대쪽으로 내려가면 탑사에 닿는다.   세찬 바람에도 흔들릴지언정 무너지지는 않는다는 돌탑들이 신기하기만 하다.

신기하게 생긴 바위산에 경관이 아름다워 도민 휴양지로 지정되었으며 이갑룡 처사가 평생 동안 쌓았다는 80여 무더기의 석탑과 함께 마이탑사가 유명하다.   탑사, 은수사, 금당사, 북수사, 이산 묘 등의 문화재가 있다.

마이산은 계절에 따라 그 모습이 달라 보여 봄에는 돛대봉, 여름에는 용각봉, 가을에는 마이봉, 겨울에는 문필봉이라고 불리우며 사계절 모두 아름답다.

봄에는 마이산 남부의 이산묘와 탑사를 잇는 1.5km의 길에 벚꽃이 만발하고 마이산 벛꽂축제가 열린다. 고 하고 가을이면 억새가 물결을 이루고 단풍이 붉게 물든다.

산행 길잡이 : 마이산은 남부주차장과 북부주차장을 이용해 오를 수 있는데 금번에는 남부 주차장을 들머리로 오른다.

산행코스-거리 : 남부주차장 - 탑사 -  은수사 - 마이산 - 은수사 - 탑사 - 비룡대 - 원점회귀  

 

 

금당사 일주문을 지나 주차하고

 

마이산 입구로 들어섭니다.

 

 

 

 

 

머얼리 마이산(암, 수)이 보입니다.

 

 

 

탑사 근처에 도착해서

 

입구로 들어섭니다.

 

신기한 탑을 축조한 이갑용 처사님

 

탑사에서 올려다 본 마이산 귀 모양

 

이갑용 처사의 조각상

 

 

 

 

 

 

 

마이산을 앞에 두고

 

탑사 여기저기를 둘러봅니다.

 

 

 

마이산 탑사의 3가지 불가사의

첫째는 이갑룡이란 도인이 1884년부터 1914년까지 30여년간 쌓았다는 80여기의 탑, 제갈공명의 팔진도법을 응용해 쌓았다는 이 탑들은 천지탑 일광탑, 월광탑, 중앙탑 용탑 등 각각 고유한 이름을 갖고 있다. 각기 다른 탑형 상반된 두 가지 기, 즉 음양의 이치와 상생과 오행의 원리에 따라 배치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폭풍우가 몰아쳐도 탑은 약간 흔들리기만 할 뿐 아무 탈 없이 서 있다는 것이다. .이들 돌탑은 똑같은 크기의 돌을 쌓아 올린 외줄탑과 피라미드형 돌탑으로 구성돼 있다. 대부분 10미터 내외이나 20미터 정도 되는 것도 있다. 혼자 들기에는 힘겨운 돌을 20미터 높이까지 어떻게 사람의 손으로 쌓아 올렸을까 하는 것도 의문이다.

두 번째 신비는 이갑룡 처사가 이 탑을 완성한 후 하늘의 계시를 받고 썼다는 30권의 신서神書 한글 도 한자도 아닌 제 3의 글자이다. 이 처사는 "영에 통달한 사람이 나오면 이 글의 뜻을 알 게 될 것이며 제세의 비법을 터득하게 될 것" 이라고 유언 했다는 것이다.

마이산의 마지막 신비는 역 고드름. 돌탑 아래 떠놓은 정한수가 거꾸로 치솟아 오르며 얼어붙는 현상을 말한다. 이 역 고드름 현상은 겨울에 나타나며 학자들은 대류현상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근거는 없다.

 

이갑룡 처사는 왜 돌을 쌓았을까?

열여섯 살에 부친을 여의고 3년 시묘살이를 하다가 산의 영기(靈氣)에 크게 감응되어 시묘살이 후 백두산에서 한라산까지 전국의 명산을 두루 찾아다니며 3·7일 기도를 올렸다.

이갑룡 처사는 ‘나는 세상 사람들의 죄를 대속하러 나온 사람이라.’고 굳게 믿고 기도에 정진하였다고 한다. 어느날 강원도 원주 치악산(雉岳山)에 들어가 기도 드릴 때 혼몽 중에 두 봉우리가 선연하게 보였다고 한다. 그 후 마이산에 가 보니 그 기이한 산세가 꿈에 보았던 바로 그곳이어다. 그래서 이갑룡은 마이산에 자리 잡고 공부를 시작하였는데 그때 그의 나이 스물 다섯이었다.

이갑룡 처사는 종종 가족과 제자들에게 이렇게 얘기했다고 한다.

“앞으로 엄청난 재앙이 온다. 사람들이 삼대 쓰러지듯 한다. 십리 길에 사람 하나 볼 듯 말 듯 하게 그렇게 인종이 귀해진다.” “그 때는 천심 가진 사람만이 살아남는다. 선(仙)의 씨앗만 남아 요순세계가 온다. 용화세계, 미륵 세상이 온다.”

 

신비스러운 탑을 둘러보면서

이갑용 처사 사적비

 

 

 

 

흐, 이런 갑자기 비가 내리네요..급하게 우비를 둘러 맵니다.

 

 

 

 

 

 

 

정상을 향해 가던 중, 은수사에 도착합니다.

 

 

 

은수사에서 올려다 본 마이산.

 

잠시나마 비를 맞으면서 직진.ㅋㅋ

 

은수사 배나무라 했던가.

 

 

 

이성계 장군이 멀리도 왔네요.

 

북부주차장에서 오면 여기~~

 

 

 

화엄굴이라.비가 멎었네요..ㅎㅎ

 

낙석으로 인해서 접근금지.

 

할수 없이 마이산 정상을 향해서 출발.

 

제법 경사가 심합니다.

 

전망대에서 잠시

 

포즈를 취하고

 

 

 

정상에 도착

 

암마이봉입니다.

 

 

 

 

 

 

 

 

 

 

 

 

 

 

 

정상에서 잠시 머무른 후

 

1차 전망대로 갑니다.

 

머얼리 비룡대가 보이네요.

 

 

 

 

 

전망대에서 바라본 화엄굴

 

숫마이봉을 굽어봅면서

 

 

 

 

 

암릉이 신기할 따름입니다.

 

다시 내려섭니다.

 

다시 마지막 정상을 향해 한 컷하고.

 

비룡대를 향해서 Go

 

 

 

멋진 자리에 비룡대가 보이는군요.

 

고금당인가요.

 

비룡대는 마이산 馬耳山(암마이봉(686.0m)과 숫마이봉(679.9m)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두 산봉우리가 서 있는 모양이 말의 귀 모양을 하고 있어 마이산으로 명명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에 속해있는 광대봉, 마두봉, 관암봉 중 한곳으로 비룡대에서는 마이산의 암마이봉과 숫 마이봉, 탑사까지 두루 조망이 가능한 527m의 나봉암에 새워져 있다.

 

비룡대에서

 

 

 

날씨가 다소 흐려서인지 사진이 좋질 못하네요.

 

 

 

 

 

비룡대와 함께하고 있는 나봉암(527m)

 

 

 

 

 

 

조선 제22대 왕. 재위 1777~1800년. 이름은 산(祘). 자는 형운(亨運), 호는 홍재(弘齋). 영조의 손자이고,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즉위 후 규장각을 설치하고 신진 학자들을 등용하고 다양한 서적을 간행했다. 정치적으로는 인물 위주로 등용하는 준론탕평책을 펼쳐 사림 붕당세력의 선택이 아니라 관료제를 통한 왕권 강화를 추구했다. 전제 개혁 등을 통해 생산을 증가시키고 장용영을 설치해 군문을 정비했다. 재정을 튼튼하게 하기 위해 북학파를 중시해 재화를 늘리도록 했다. 사회 전반적인 개혁을 해나갔지만 갑작스런 죽음으로 완성하지 못했다.

 

이산묘에는 단군을 위시하여 태조, 태종, 고종의 어진을 모신을 회덕전이 있다. 그리고 그 아래로 조선건국 후 충신과 유림 40인의 위패를 모신 사당과, 을사늑약이후 충신과 열사 34인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 자리하고 있다.

 

‘이산묘’ 현판은 1949년 원장으로 선출된 이시영부통령의 글씨이다. 

‘대한광복기념비’ 휘호는 이승만대통령의 글씨이며 후면의 비문은 함태영부통령이 지은 글이다.   이산묘 건너편 계곡 암벽에 새겨 놓은 ‘청구일월 대한건곤(靑丘日月大韓乾坤)’ 은 백범 김구의 글씨이다. 김대중 대통령 친필의 ‘호남의병창의동맹단결성지’ 비도 있다. 

 

  

이산묘 앞 도로 건너편 바위에는 고종 친필의 ‘비례물동(非禮勿動)’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본래 이산묘에 ‘비례물동’이라고 쓴 편액이 있었다. ‘비례물동’은 『논어』에 나오는 것으로 예가 아니면 행하지 말라는 것인데, 역으로 예라면 행하라는 것으로 고종이 의병 창의를 독려한 글귀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마이산 이산묘 일원은 조선건국의 정신과 조선말 구국항쟁의 중심이 되었던 곳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산묘가 마이산 남부주차장 밖에 위치하고 있어서 사람들이 모르고 들리지 않는 곳이 되었다. 불과 얼마 안 되는, 조금만 걸으면 되는 거리이지만 마이산을 찾는 탐방객들이 차량으로 이동하기 때문에 이산묘를 지나쳐 버리기 십상이었다.

 

현재 진안군에는 천연기념물을 제외한 기념물로, 마이산(66호)을 비롯한 만육 최양선생 유허비(81호, 백운면 반송리), 태평 봉수대(36호, 주천면 대불리) 등이 있다.

 

주필대 암봉

마이산 탑사를 오르기 위해 주차장에 들어서면 우측에 주필대와 이산묘가 있다.

태조 이성계가 고려말 대장군시절 황산대첩을 승리로 이끌고 복귀하던 길에 굳이 먼 길을 돌아 이곳 진안 마이산까지 왜 왔는지 미스터리이지만, 금척을 얻기 위한

행보로 추론할 수 있다.

이 거대한 암벽 밑이 이성계가 말을 쉬게 했다는 주필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