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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산_백담사, 낙산사 (속초)__2014/8/10

백고무신 부부 2014. 8. 11. 18:30

☞.두번째 여행 방문지로 백담사 선택 :

강원 인제군 북면 용대리 산 12-31번지 있는 사찰로서 옛 전통이 머무러던 곳으로도 유명한 곳이기도 하여..

백담사는 내설악에 있는 대표적인 사찰로 백담계곡 위에있어 내설악을 오르는 길잡이가 되고있으며 한계사 창건 후 1772년까지 운홍사,심원사,선구사,영취사로 불리다가 1783년 최붕과운담이 백담사라 개칭하였다.고 한다.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 본사인 신흥사의 말사 로.  이 절의 기원은 647년(진덕여왕 1)에 자장(慈藏)이 창건한 한계사(寒溪寺)이다.    690년(신문왕 10)에 화재로 소실된 것을 719년(성덕왕 18)에 재건했다. 785년(원성왕 1) 다시 불탄 것을 790년에 종연(宗演)·광학(廣學)·각조(覺照)·영희(靈熙)·법찰(法察)·설흡(雪洽) 등이 절터에서 30리 아래로 옮겨 운흥사(雲興寺)라고 했다. 984년(성종 3)에 다시 화재로 소실되자 987년에 동훈(洞薰)·준희(俊熙) 등이 운흥사지의 북쪽 60리 되는 곳에 옮겨짓고 심원사(深源寺)라고 개칭했다. 1432년(세종 14)에 또다시 불이 나자 의준(儀俊)·해섬(海暹)·취웅(翠雄)·신열(愼悅) 등이 옮겨 짓고 선구사(旋龜寺)라 개칭했다. 1443년 화재로 소실되자 1447년 옛 터 서쪽 1리쯤 되는 곳에 절을 짓고 영취사(靈鷲寺)라고 했다. 1455년(세조 1)에 다시 화재로 불타버리자 재익(載益)·재화(載和)·신열 등이 옛 터의 상류 20리 되는 곳에 중건하고 백담사라고 개명했다. 1775년(영조 51)에 다시 불이 나자 최붕(最鵬)이 태현(太賢)·태수(太守)와 함께 중건하고, 심원사(尋源寺)라고 개칭했으나 1783년(정조 7)에 다시 백담사로 환원했다. 1915년에 일어난 화재로 거의 모든 당우가 타버린 것을 당시 주지였던 인공(印空)이 중건에 착수해 1921년에는 응향각 등 사무실 30여 칸을 새로이 짓고, 종과 북을 주조해 낙성법회를 열었다. 근대에 한용운이 머물면서 〈님의 침묵〉, 〈불교유신론 佛敎維新論〉을 집필하는 등 만해사상의 산실이 되었다. 6·25전쟁 때 불탄 것을 1957년 중건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88년 11월 23일 전두환 전(前)대통령 내외가 대(對) 국민사과성명 발표 후 이 절에 은거했다가 1990년 12월 30일에 연희동 사저로 돌아가면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현존 당우로는 대웅보전·칠성각·선원(禪院)·요사채 등이 있고, 남쪽으로 150m 떨어진 곳에 관음전이 있다. 그밖에 자장의 유물로 전하는 아미타상과 소종(小鐘), 인조(仁祖)의 하사품인 옥탑(玉塔), 설담당(雪潭堂) 부도, 연포당(蓮浦堂) 부도 등이 있다.(퍼옴)

 

전통땀시 유명한 곳이라 들러보기로.ㅋㅋ

 

휴가를 즐기기 위해 슬리퍼도 샀는데.ㅎㅎ

 

 

 

 

물이 말라도 너무 말랐다. 가뭄이 워낙 심해서..

 

 

 

 

 

보슬비가 내려서.

 

만해 선생 앞에서

 

 

 

가뭄 현상이 심해서 기 현상이 발생했다.

 

차~려~ㅅ

 

 

 

낙산사 :

설명 : 신라 문무왕 11년(671) 의상대사에 의해 창건된 낙산사 주변의 일원이다. 낙산사 일원에서는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의 건물지가 발견되고 기와조각 등이 출토되었다.

경내에는 보물인 낙산사칠층석탑 등 7건의 국가지정문화재와 낙산사홍예문 등 6건의 지방지정문화재가 있다. 주변 해변은 관동팔경의 명승지로 김시습, 허균, 김홍도 등 많은 문사들의 관람지가 되었으며 그들에게 영감을 준 그림과 글들이 남아있다.

2005년 대규모 산불이후 발굴조사를 통해 학술적, 역사적 가치가 인정되어 지난 2008년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된 곳이다.

“의상대사가 관음보살의 계시를 받고 지은 낙산사”

낙산사는 설악산의 줄기가 바다로 뻗은 오봉산을 배경으로 하여 신라 고승 의상대사가 관음보살을 친견하고 지은 절이다. 신라시대 의상대사는 바닷가 동굴에 관음보살이 머물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몸소 친견하고자 이곳을 찾았다. 의상은 바닷가 바위 절벽 위에서 여러 날을 기도한 끝에 천룡팔부의 시종을 만나서 수정염주 한 벌과 여의보주 한 벌을 받았다. 이윽고 관음보살이 의상대사 앞에 나타나 “이 자리 위 꼭대기에 대나무 한 쌍이 돋아날 것이니 그곳에 불전을 짓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의상은 곧 그곳에 절을 지어 낙산사라 부르고 받은 구슬을 성전에 모셨다. 훗날 의상대사가 수도한 절벽 위에 정자를 세워 ‘의상대’라 불렀고, 관음보살이 바다에서 붉은 연꽃을 타고 솟아오른 자리 옆에 법당을 지어 ‘홍련암’이라 했다.

설명 : 양양낙산사는 2005년 산불피해 이후 3차례에 걸친 발굴조사 결과 통일신라시대 및 고려시대 건물지와 기와편들이 다량 출토되어, 신라 문무왕 11년(671) 의상대사에 의해 창건된 이후 헌안왕 2년(858)에 범일국사, 조선 초기 세조연간에 중창되는 등 수차례의 중창불사를 거친 역사적 사찰임이 확인되었다. 또한, 사찰 경내에는 조선전기의 7층 석탑과 원통보전의 담장, 홍예문, 사리탑, 홍련암과 의상대 등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고, 주변 해변을 끼고 있는 명승지는 예로부터 관동팔경의 하나로 문사(文士)들에 의해 수많은 고전과 시문(詩文)이 전해지고 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 본사인 신흥사(神興寺)의 말사로서 해변에 위치하며 관동팔경의 하나로 꼽힌다. 낙산은 산스크리트의 보타락가(補陀洛伽 Potalaka)에서 유래한 말이며 관세음보살이 항상 머무는 곳을 뜻한다. 우리나라 3대 관음기도 도량의 하나인 낙산사는 671년(문무왕 11) 의상(義湘)이 창건했다고 전한다. 낙산사 창건 이후 이 절과 관련된 〈삼국유사〉의 기록으로는 원효(元曉), 조신(調信), 사굴산파의 개산조 범일(梵日)의 이야기 등이 전하고 있다. 이 절은 858년 범일에 의해 중건된 후 여러 차례 불타 중건이 거듭되었으나 6·25전쟁 때 완전히 소실되었고 1953년과 1976년에 다시 복구해서 원통보전(圓通寶殿)·종각(鐘閣)·일주문(一柱門)·선당(禪堂)·승당(僧堂)·객실(客室) 등의 건물이 있다. 문화재로 지정된 유물·유적은 낙산사동종(보물 제479호), 낙산사7층석탑(보물 제499호), 낙산사홍예문(강원도유형문화재 제33호), 낙산사원장(강원도유형문화재 제34호), 낙산사홍련암(강원도유형문화재 제36호), 양양낙산사사리탑(강원도유형문화재 제75호) 등이 있다. 1977년에 화강암으로 만든 동양 최대의 해수관음입상(海水觀音立像)이 있으며, 절 앞에는 의상의 전설이 담긴 홍련암 등이 있다. 그러나 2005년 4월 5일 강원도 양양 지역에서 발생한 큰 산불로 낙산사원장·원통보전·일주문·낙산사홍예문 등 주요 전각과 낙산사동종이 소실되고, 낙산사 7층석탑이 일부 손상되었다.

 

 

 

 

 

 

 

 

 

 

 

 

 

 

 

 

 

 

 

 

 

 

 

 

 

 

 

여기저기 다니느라 피곤하군..흠..

 

저쪽에 홍련암이 보인다.가볼까?

 

 

 

화재를 되 살리기 위해 마련한 곳인데 관리가 여엉 부실하다.

 

다시는 이런 화재(자연이든, 인재던)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교육 현실이 안타깝다.

엄청난 국민세금이 들었을텐데.  

 

홍련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