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여! 백 고무신
☞.고향(불정)역에서 낭만과 함께. 본문
☞.고향의 추억이 깃든 불정역입니다. (문경과 점촌 사이에 있는 꽤 세월이 묻어 있는 역사죠.)
고향에 관광지로 개발중이라고하네요.. 한컷 했습니다.
문경시 점촌의 [지명유래]
<신기동(新機洞)>
새터라 불려오던 마을이 1914년 4월 1일 지방관제 개편에 따라 새터(新機)와 틀모산(機堤)을 합하여 신기의 신(新)과 기제의 기(機)를 따서 문경군 호서남면 신기리로 호칭했고, 문경군에서 분리 점촌읍이 시로 승격되면서 호계면 별암2리(舟坪)를 합쳐 신기동으로서 유곡, 불정동을 관할하는 행정동이 되었다가 1999년 문경시 신평동에 편입되었다. 1950년대 초부터 공업지역으로써 쌍용 양회 공업(주)문경공장, 쌍용 정공등이 가동되고 있고 46,000평의 공업단지가 새로 조성되었으며 앞으로 경상북도 상설 자동차 면허시험장이 들어서면 지역발전에 더욱더 박차를 가할 것으로 기대 되고 있다. 북쪽을 흐르는 영강을 경계로 호계면과 접하면서 비옥한 주평들이 펼쳐 있고 동서로 문경, 가은선 산업철도가 관통한다. 특히 신기초등학교, 우체국, 점촌농협지소, 경찰관파출소, 주평역등 공공기관이 자리하고 있다.
- 틀모산∙기제동(機堤洞)
조선 선조(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을 당하여 江? 金氏 가 이곳에 이주하여 개척하였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신라 때 이곳에 큰 절이 있었다고 한다. 그 절 이름이 기제사(機堤寺) 또는‘틀모사’라고 하여 그 절 이름을 따서 동명을‘틀모산’혹은 기제동(機堤洞)이라 불러온다.
- 꽃밭모리∙화전동(花田洞)
온 산천에 봄이면 철쭉꽃이 만발하여 마치 온 산이 큰 꽃봉오리처럼 보였으며 1892년경에는 마을에 목화를 심어 목화꽃이 활짝 피어 앞 뒷 뜰이 온통 꽃밭이 되었으며 가을에는 목화송이가 또 한번 활짝 피어 꽃밭을 이루게 되니 사철 온통 꽃밭마을 같다고 하여 산모롱이의 모롱을 붙여‘꽃밭몰이’또는 화전동(花田洞)이라 부르게 되었다.
- 새터∙신기(新機∙新基)
1893년에 유곡(谷)에 거주하던 평산신씨(平山新氏) 일부가 이곳으로 이주하여 새동네를 이루고 새 터전을 개설하였다는 뜻으로‘새터’라고 불리어졌으며 1906年행정구역 정리에 따라 신기(新機)라고 고쳐 불리게 되었다. 지명과 우연한 일치인지 1950년대에 정말 새로운 현대식 양회공장이 서게 되어 마을은 물론 우리고장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 뒷골∙후곡(後谷)
새터가 점점 번성하여 가구수가 늘어나게 되자 새터 사람들이 幽谷里로 넘어가는 산골쪽 뒷골에 새로 한집 두집 집을 짓고 마을이 형성됨에 이 마을을 뒷골 또는 谷이라 칭하게 되었다.
- 뱃들(堤坪)
지형이 마치 큰 배(舟)처럼 생겼다 하여 뱃들이란 이름이 붙게 되었다고 한다. 본래 호계면 별암2리였던 것이 1986년 점촌읍이 점촌시로 승격되면서 신기동에 편입 되었다. 1945년 이전에는 뱃들(舟)에 불과 4~5가구가 살았는데 1954년 우리나라 최초로 국가기간산업체(國家基幹産業體)인 시멘트공장(工場)이 건설되면서 급속하게 발전하였다. 공장부지가 일부는 점촌읍 신기리요, 일부는 호계면 별암리로 양읍면(雨邑面)의 경계에 걸쳐 있었다. 1955년에 문경탄전(聞慶炭田)에서 생산되는 석탄(石炭)과 신기에서 생산되는 양회를 수송하기 위해 산업철도인 문경선(聞慶線) 철도가 부설되고 주평역(舟坪驛)이 생겼으며 5일시장이 개설되면서 인구가 급증하여 당시로서는 호계면 상공업의 중심지가 되었었다.
- 비행장(飛行場)
대한양회공장(大韓洋灰工場) (현 쌍용양회) 서북편 평탄한 잔솔밭에 비행장(飛行場)이 생겼다가 지금은 없어졌다.
- 전설(傳設)(1)
뱃들의 지형이 흡사 큰 돛을 단 배와 같아 우물(샘)을 파면 마치 배(舟)에 구멍을 뚫은 것과 같다 하여 샘을 파지 않았는데 주평시장의 인구가 급증하여 식수를 해결코자 당시 호계면에서 굴정(堀井)공사를 시작하였으나 몇 군데를 파도 물이 나오지 않아 고생을 했다고 한다. 외형상 보기에는 영강 가까이라 어디서든 물이 나올 것 같으나 주평시장 안에 지금의 공동샘에서 겨우 물이 조금 나오긴 하나 물맛이 영강물만도 못하다고 한다.
- 전설(傳設)(2)-뱃들의 백마계주(白馬鷄舟)
신기동 일원인 뱃들(舟坪)에는 풍수지리설(風水地理設)의 천하명당(天下名堂)인 백마계주혈(白馬繫舟穴)이 있다고 하여 이것을 믿는 수많은 지사(地師)들이 이곳의 명당(名堂)을 찾아오고 수많은 시체(屍體)들이 이곳에 묻혔다가 옮겨간 곳이다. 백마계주혈(白馬鷄舟穴)이란 흰빛 말(馬)을 배(舟)에 매어 놓은 형(形)이란 뜻으로 이 혈(穴)에 묘를 쓰면 자손중에 삼갈팔신[三葛八信 :중국 삼국시대의 위대한 전력가였던 제갈양(諸葛亮) 같은 사람 셋과 상승장군(常勝將軍) 한신(韓信)같은 사람 여덟사람]이 난다고 하는 명당(名堂)이라 한다. 일설에는 백마계주(白馬繼走 :흰 말이 계속 달린다)라고도 하는데 문경선(聞慶線) 철도(鐵道)가 생겨 기차(汽車 : 鐵馬)가 달리게 되어 철마계주(鐵馬繼走)가 되었다고도 말한다.
<대성동(大成洞)>
1986년 점촌읍이 시로 승격되면서 관할내에 대성탄좌 문경광업소가 있어서 대성동이라 명명하였으며, 신기동, 불정동, 유곡동을 관할하는 행정동이였다가 1999년 신평동이 신설되면서 폐지되었다.
- 유곡동(幽谷洞)
(1) 유곡(幽谷)
고려시대부터 유곡역(幽谷驛)을 개설하여 찰방(察訪)이 배치되었는데 이 유곡찰방(幽谷察訪)이 18개 속역을 관장한 큰 역촌(驛村)이었다. 전해 오는 말에 의하면 지역이 넓고 골이 깊숙하여 그윽한 골이라고 해서 유곡(幽谷)이라고 칭하였다 한다. 역(驛)이 생기고 인구가 늘고 생활이 넉넉해지자 도둑이 자주 들어 왔다고 하여 마을을 수호하는 뜻에서 수호신단(守護神壇)을 설단하고 제사 지낸 후에는 이 수호신의 보호로 한번 들어온 도둑은 밤새도록 헤매어도 동네를 벗어나지 못하고 갇혀 있었다 하여 유령(幽靈)의 영험을 나타내는 뜻으로 유곡이란 동명이 지어졌다고도 한다.
(2) 한적골∙한절골∙대사동(大寺洞)
유곡의 남동쪽으로 나지막한 산등성이를 넘으면 자그마한 동네가 있는데 바로‘한적골’마을이다. 전설에 의하면 옛날 이곳에 큰절이 있었다고 하여 한절골(大寺洞) ‘한’은 크다는 뜻으로 큰 절골이란 뜻이다. 그후 점점 변음되어‘한적골’이라 부르게 되었다 하나 지금은 그때의 절 흔적을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다만 옛날의 약수터인 장군수(將軍水)의 맑은 샘물만은 지금도 남아 있어 동민들의 식수로 이용되고 있다. 이 장군수(將軍水)샘물도 뭔가 유래가 있음직 하나 고증할 도리가 없어 아쉽다. 한편‘한적골’이란 동명도 또 다른 추상적 고증으로‘한적’이란 우리나라 말의 뜻으로 보면 한가롭고 조용하고 편안하다는 것으로 통한다. 따라서 한적골이란 조용한 곳이란 뜻에서 지어진 마을 이름이 아닌가도 생각된다.
(3) 마본(馬本)
유곡리 서쪽에 위치하여 고려초부터 영남(嶺南)과 한양(漢陽)을 잇는 역촌(驛村)의 본거지로서 영남지방 18개 역을 관장하던 찰방(察訪)이 역마(驛馬)를 사육하고 관리하던 곳이라고 하여 마본(馬本,)이 한다.
(4) 새마을∙신리(新里)
유곡리 동쪽에 새로 형성된 부락으로 옛역촌이 발전하게 됨에 따라 사람이 많이 모여 살게 되자 이곳에 새로 마을이 형성되어 새로 되었다는 뜻으로 새마을 혹은 신촌, 신리등으로 불리게 되었다.
(5) 아골∙앗골∙아동(衙洞)
주막마을에서 서쪽으로 깊숙한 골짜기에 위치한 마을로서 유곡역 찰방이 집무하던 관아(官衙)가 있었으며 아전(衙前)이 모여 살던 곳이라 하여 처음에는 아동(衙洞)이라 불러오다가 아골∙앗골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6) 주막(酒幕)
유곡 역촌이 번성해짐에 따라 영남과 한양을 연결하는 요로(要路)가 되어 오가는 통행인이 많아지게 되므로 한길 주변에 주막이 생기게 되어 길손들의 숙식을 제공하는 휴식처가 되었다고 하여 주막∙주막걸(주막거리)로 칭하게 되었다.
-불정동(佛井洞)
(1) 부처샘∙불정(佛井)
1650년경에 전주이씨(全州李氏)가 이곳에 이주하여 개척한 마을로서 운암사(雲岩寺)가 있는 절골의 부처샘에서 맑고 깨끗한 물이 이 마을로 흐른다고 하여 부처샘이라고 불러오다가 행정구역 확정 때 한자로 불정(佛井)이라 동명을 개칭하게 되었다.
(2) 굴모∙굴모랭이∙원골∙원곡(院谷)
이곳은 석회암(石灰岩)으로 된 동굴이 많아 굴모랭이로 부르다가 차츰 변음(變音)되어 굴모리(굴 모롱이)로 또는 굴모로 불리게 되었다. 고려때 원(院)이 있어 길손들의 숙박시설로 이용되었다고 하여 일명‘원골’또는 원곡(院谷)이라 칭한다. 한때 대성광업소가 있어 탄굴이 더욱 많이 생겨 옛 굴모랭이(굴모리)라는 지명과 더욱 일치하게 되었다.
(3) 새터마∙신동(新洞)
불정리에 석탄광산이 개발되자 외지에서 광부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여 산골짜기 오막살이 주택이 지어지고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하여‘새터마’∙‘신동(新洞)’이라 부르게 되었다.
(4) 수통배기
불정역의 남동쪽으로 약 2㎞지점에 위치한 운암사(雲岩寺) 부처샘에서 흐르는 물을 여기서 조절하였다 하여 수통배기라 일컬어 왔는데 1930년경에 시멘트관(管)으로 수로(水路)를 보수하였다.
(5) 쟁마∙재궁마∙장촌(長村)
불정의 동편에 형성된 자그마한 부락인 바 마을의 모양이 길쭉하게 생겼다고 하여 장마∙쟁마∙재궁마라고 부르다가 장촌(長村)이라고도 불러 왔다. ‘재궁마’라는 뜻으로 보아‘재궁’∙‘재사’가 있었던 것으로도 추정된다.
(6) 동막골(東幕谷)
석탄광산이 개발됨에 따라 장촌(長村)의 동편(東便)으로 막사(幕舍)가 세워지고 광부들이 거주하게 되어 이 마을을 동막곡(東幕谷) 또는 동막골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7) 양달마∙양지촌(陽地村)
음달마의 맞은 편에 위치하며 운암사(雲岩寺)로 가는 입구에 있는 마을이다. 전주이씨(全州李氏)가 이곳으로 이주하여 개척하였다 하며 해가 떠서 하루 종일 양달이란 뜻으로 양달마 또는 양지촌(陽地村)이라 불러 왔다.
(8) 음달마∙음지촌(陰地村)
양지촌의 맞은편 음달쪽에 위치한 마을로서 전주이씨가 많이 살고 있으며 해가 떠서 한나절이 되어서야 햇빛을 볼 수 있는 음지(陰地)에 있다고 하여 음지마 또는 음지촌(陰地村)이라 부른다고 한다.
<공평동(孔坪洞)>
점촌읍 공평리(1~4)가 1986년 점촌읍이 시로 승격되면서 모전동에 소속되었다가 1999년 신평동이 신설되면서 신평동에 편입되어 신평동 동사무소가 위치하고 있다.
- 배실∙이곡(梨谷)
임촌(林村)에서 북쪽으로 약 1.5㎞지점에 위치하는 작은 마을로서 풍수지리설(風水地理設)에 지형이 배(舟)와 같이 생겼다고 배실(行舟形) 또는 배나무가 많이 있었다는 뜻으로 배실(梨谷)이라 불렀다고 하나 지금은 그때의 배나무는 한그루도 찾아볼 수 없고, 앞산모양이 배와 흡사함은 사실이다.
- 미리실∙구엉마∙꿩마∙진곡(辰谷)
임촌에서 서쪽으로 약 2㎞지점에 위치하는 마을이다. 전설에 의하면 지형이 꿩이 엎드려 있는 형상과 같다고 하는데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호계면(虎溪面)의 견탄(犬灘)과 영순면(永順面)의 포내(浦內포수)가 있어 개와 총(犬∙ 銃)이 두려워 꿩이 날지 못하고 기어 다녔다 하여 구엉마라고 불러오다가 후에 꿩마로 불렀다 한다. 그러나 마을 이름이 [구엉마]라고 함은 바위에 구멍(굴)이 있다고 하여 조선시대에 공암(孔岩)이라 불린 것이 정설이다. 공평(孔坪)이란 이름이 구엉마에서 유래되었으며 옛날에는 孔岩里 로도 불렀으며 孔坪의 유래도 여기에 있다. 진곡(辰谷)을 미리실이라 하며 미리는 옛 용을 말한다. 여기
에는 조선시대 보통원(普桶院)이 있었다.
- 임촌(林村)
1660년경에 평택인(平澤人) 임시익(林時益)이 충주(忠州) 단월에서 이주하여 개동하고 林氏 들만의 집성촌이라 하여 林氏이라 불려지고 있다.
- 잡살모리∙작살모리∙작사동(作沙洞)
임촌의 맞은편 3번국도 주변에 위치하고 있으며 임촌에서 거주하던 임씨(林氏) 일부가 모래와 돌무지가 많은 이곳으로 이주하여 개척하였다. 모래와 돌무지의 땅을 일구었다 하여 작사(作沙)동이라 칭하다가 산모퉁이에 위치하였다는 것으로 좀더 세분하여‘작사모리’, ‘작살모리’로 불리어지고 있으며 지금도 그때의 모래더미가 마을 뒤에 남아 있다. 마을 앞에 신평동사무소가 위치하고 있다.
- 장승백이∙장승리(將丞里)
배실에서 북서쪽으로 약 1㎞지점에 위치하는 작은 마을이며 1592년 임진왜란때 전사한 將軍의 비석(碑石)이 마을 입구에 서 있다고 하여 장승백이 또는 장승리(將丞里)라고 부르게 되었다고는 하나 그 당시의 장군이 누구인지, 참고할 도리가 없다. 비석도 흔적을 찾을 길이 없어 아쉽다. 또한 옛날 이정표인 장승이 서 있던 마을이라 장승백이라 한다고 한다. 1999년에 지명에 걸맞게 마을 앞에 장승을 깎아 세워 오가는 길손을 반기고 있다.
- 표석골(表石谷)
공평리(孔坪里)에서 가장 큰 마을로 상주군 사벌면(商州郡 沙伐面)에서 이주한 평해황씨(平海黃氏)가 처음으로 개척하였다고 하며, 신라 때 김유신(金庾信)장군이 함창과 점촌사이에 있는 뙤다리(唐橋)에서 당군(唐軍)을 물리치고 이곳에 전승비(戰勝碑)인 표석을 세웠다고 하여 표석골(表石谷)이라 칭하여 왔으나 그때의 표석(表石)을 찾아볼 수 없다.
*기타 마을 유래
<정리(鼎里)>
- 솥골∙정리(鼎里)∙소계동(蘇溪洞 )∙솟골
1480년경(약 500년전)에 엄씨와 안씨가 정착하여 이 마을을 개척하였다고 하는데 그 당시에 이곳에 소태나무와 까털복숭아(재래종)가 많이 자라고 있었는데 개울가에는 차조 기풀이 무성하여 동명을 소계동이라 하였다 한다. 이 마을에는 성주봉, 주지봉, 능곡봉 등 3봉이 솥발과 같이 둘러싸여 있고 마을이 부엌 아궁이 같은 곳에 자리 잡았다 하여 솥골 또는 정리라 하였다 한다. 또 땅에서 솟는 샘이 있어서 조천(潮泉)이라 하였는데 샘물이 하루 두 번 크게 솟으므로 솟골이라 하였다 한다.
<밋발이∙진마을∙점마∙점촌(店村)>
정확한 연대와 유래는 알 수 없으나 1400년경부터 지세와 산세 즉 돈달산 기슭이 마치 매의 발처럼 생겼다고‘매발’이 변음되어 맷발로 또는 밋발, 다시 밋바리, 혹은 밋발이로 불리어진 것 같기도 하고 한편 산기슭에 길게 형성된 마을이라고‘긴마을’로 불리던 것이 변음되어 진마을이라고 불리다가 1829년경 옹기와 기와를 굽는 장인(匠人)들이 많이 모여 옹기점 기와점이 생기고 또 점방이 늘고 상인들의 왕래가 많아짐에 따라‘점마’라고 불렀으며 1906년 행정구역 정리때 리라고 칭하게 되었다. 한편‘밋발이’이란 동명은 돈달산 기슭이 옛 공동묘지가 있던 곳으로‘미(묘)’가 많이 있는 발치라 해서 ‘밋발, 밋발이’이라 부르게 된 것이라 추측된다.
- 뙤따리(唐橋里, 允直 2里)
시계에서 철로위 육교를 지나 첫번째 마을인데 한말까지 주막(酒幕)거리를 이루어 상주, 문경, 용궁방면으로 가는 갈림길 목으로 도부상, 소장사 등의 왕래가 많아 흥청거렸다고 한다(옛적에 唐橋院이 있었다 한다). 지금의 마을은 그 후 새집들이 들어서서 이룩 되었다.
- 당교리의 전설
당교(唐橋)는 모전동과 윤직리의 경계를 이루는 모전천에 놓여 있는 다리의 이름인데 이 일대를 뙤따리라 불렀다. 삼국유사 기이편 제29 태종대왕조(三國遺事 紀異編 第 29 太宗大王條)에 보면 “또 신라의 옛 전기에 이르기를 소정방이 이미 고구려와 백제의 두 나라를 치고서 또 신라를 치려는 속셈으로 머무르고 있으므로 이에 김유신이 그 꾀를 알고 당병을 대접하면서 짐주(짐주)를 먹여 죽게 하여 쓸어 묻었으니 지금의 상주경계에 있는 당교가 바로그 곳이라 한다.”라 하였고 다른 전설에 이르기를“고종때 신라 태종왕 7년에 당나라의 장수 소정방이 이 곳에 병사를 주둔시킨 까닭으로 이름하였다”라고 전한다.
(原文) 又新羅古傳云 定方旣討麗薺二國 又新謀羅而留連 於是 庾信知其謀 饗唐兵之
皆死坑之 今尙州界唐橋 是其坑地
一云 高宗時 新羅太宗王七年 唐將蘇定方 餠兵於比故名之云
(자료 : 문경지방의 산성 p31외)
- 임진왜란과 당교
당교의 위치는 경상좌우도(慶尙左右道)와 서울로 향하는 분기점(分岐點)에 해당하여 그 중요성은 예나 지금이나 같다 하겠다.
“임진년(1592) 4월 27일에 왜적의 일대인 모리휘원(毛利輝元)군이 하풍진(河豊津:지금의 영순면 이목리)을 건너 당교에다 진을 치고, 영남좌우도와 기호(畿湖)간의 왕래를차단하고 주변의 고을을 약탈하므로 우리측에서 수차례 공격하였으나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하였다. 당교의 적이 얼마나 난공불락이었는지 그 해 12월에 경상좌병사 한효순(韓孝純)이 올린 장계(狀啓)에, “당교의 적은 좌우도의 인후(咽喉:목구멍)가 되는 곳에 있어 그 세력이 창성하니 무엇보다도 이 적을 치기로 목표를 세워 수개월이 가까웠으나 적이 편리한 지점에 점거하여 있고, 중간에 큰 내가 가로막혀 장수등이 어렵게 여기어…”라 하였다. 그 후에도 쉽사리 탈환하지 못하다가, 상주전투에서 적을 크게 파하고 상주성을 화공법(火攻法)으로 수복한 바 있는 상주판관(尙州判官) 정기룡(鄭起龍)장군이 원병요청을 받고 상주에서 당교에 급진하여 일전으로 적을 크게 파하고 적진을 소탕하니 적군이 상주부근에는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
(자료 : 선조중흥지 권3 매헌실기, 문경지역의 산성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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밋발이∙진마을∙점마∙점촌(店村)>
정확한 연대와 유래는 알 수 없으나 1400년경부터 지세와 산세 즉 돈달산 기슭이 마치 매의 발처럼 생겼다고‘매발’이 변음되어 맷발로 또는 밋발, 다시 밋바리, 혹은 밋발이로 불리어진 것 같기도 하고 한편 산기슭에 길게 형성된 마을이라고‘긴마을’로 불리던 것이 변음되어 진마을이라고 불리다가 1829년경 옹기와 기와를 굽는 장인(匠人)들이 많이 모여 옹기점 기와점이 생기고 또 점방이 늘고 상인들의 왕래가 많아짐에 따라‘점마’라고 불렀으며 1906년 행정구역 정리때 리라고 칭하게 되었다. 한편‘밋발이’이란 동명은 돈달산 기슭이 옛 공동묘지가 있던 곳으로‘미(묘)’가 많이 있는 발치라 해서 ‘밋발, 밋발이’이라 부르게 된 것이라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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