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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3월 22일 사적 제147호로 지정되었다. 제1·제2·제3관문 및 부속성벽이다. 옛날에 영남에서 서울로 가려면 문경에서 주흘산(主屹山:1,106m)을 넘는 것이 보통이었다. 신라 때는 주흘산의 한 갈래인 대촉산(黛蜀山)을 넘어 계립령(鷄立嶺)으로 다녔고 조선 전기부터는 조령이 개척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남으로써 이곳에 중국의 산해관(山海關)과 같은 방위시설을 축조해야 한다는 논의를 낳았다. 현지 실측(實測)이 시행되고, 1594년(선조 27) 영의정 유성룡(柳成龍)이 구체적 방안을 제시하였다.
충주 사람으로 수문장(守門將) 출신인 신충원(辛忠元)이 조정의 결정에 앞서 조령에 머물면서 단독으로 설관(設關)에 착수하였다. 그가 이루어놓은 첫번째 시설이 지금의 중성(中城)이다. 중성은 1708년(숙종 34) 크게 중창(重創)되었는데, 이것이 곧 제2관문이다. 숙종 때 제2관문에서 3km 떨어진 곳의 남적(南賊)을 방비할 제1관문을 세우고 초곡성(草谷城:主屹關)이라 하였다. 이들은 1890년대에 다시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육축(陸築)에는 홍예문(紅霓門)을 열고, 성벽에는 총구멍이 있는 성가퀴를 돌리고, 한쪽에 큼직한 수구문(水口門)을 뚫었다. 숙종 때 조령 재 위에 북적(北賊)을 막기 위하여 조령산성(鳥嶺山城)을 쌓았다. 이것이 곧 제3관문으로 현재 경북과 충북의 경계에 위치한다. 제3관문은 육축만 남겨 놓은 채 불타버려 1977년 복원하였다.
제1·제2·제3관문은 양쪽 산의 골짜기에 위치하며 관문 좌우의 성벽은 능선을 따라 우회한다. 높은 봉우리 6분선(分線)에서 끝났다가 다음 골짜기에서 다시 이어져 초곡 ·중성 ·조령산성의 성벽을 이룬다. 동화원(桐華院)을 비롯하여 진(鎭)과 군창(軍倉)의 터가 있고, 경상감사(慶尙監司) 신임·후임자가 서로 교인(交印)했다는 교구정(交龜亭)의 터도 남아 있다. 문경시에서 관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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