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여! 백 고무신
☆.평산 신씨(平山 申氏)는~ 본문
평산 신씨(平山 申氏)는 황해도 평산군을 관향으로 삼는 한국의 성씨이다. 시조는 고려 개국공신 신숭겸이다. 신씨 중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본관이며, 현존 신(申)씨 가운데 평산 신씨가 71% 이상을 차지한다.
고려의 개국공신인 신숭겸(申崇謙)이 시조이다. 현재의 강원도 춘천시인 광해주 출신으로, 태봉의 장군으로 있다가 왕건을 추대하여 고려를 건국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신숭겸의 본래 이름은 삼능산(三能山)이었으나, 왕건에게 신(申)씨 성을 사성 받았다. 팔공산에서 견훤과의 전투 중 전사하였다.
계파 : 평산 신씨는 문희,밀직, 장영, 현령, 정언, 한성윤, 사간, 온수감, 제정, 전서, 이상, 판사, 진사, 감찰, 판윤, 참판, 군수공파 등 17개 파가 등록돼 있다.
평산은 황해도 남동쪽에 위치한 고을의 지명으로, 본래 고구려 때 대곡군(大谷郡) 또는 다화홀(多和忽)이었다.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영풍(永豊)으로 이름을 고쳤으며, 고려 초에 평주(平州)로 바뀌었다. 서기 1272(원종 13)년 복흥군(復興郡)에 합쳐졌다가, 충렬왕(忠烈王) 때 다시 복구되었다. 조선 시대에 들어와 서기 1413(태종 13)년에 평산으로 바뀐 뒤, 도호부(都護府)로 승격되었다. 고종 32(서기 1895)년에 군으로 다시 격하되었다.
평산 신씨의 시조는 고려의 개국공신으로 벽상공신삼중대광태사(壁上功臣三重大匡太師)에 오른 신숭겸이다. 그의 초명(初名)은 능산(能山)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본래 전라도 곡성현 출신으로 태조가 평산에서 사성(賜姓)하였다고 한다. 또『고려사(高麗史)』 열전(列傳)에는 그를 지금의 춘천지방인 광해주(光海州)사람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신증동국여지승람』 춘천도호부 인물조에 신숭겸의 이름이 실려 있고, 또한 그의 묘가 춘천에 있다. 이로 미루어보면, 그는 본래 곡성 출신으로 뒤에 춘천에 옮겨와 살게 되어, 묘도 춘천에 쓰게 된 것으로 보인다.
신숭겸은 몸집이 장대하고 무용(武勇)이 뛰어났는데, 처음에는 궁예가 세운 태봉의 기장(騎將)으로 있었다. 고려 태조 원년이던 서기 918년에 배현경(裵玄慶)· 홍유(洪儒)· 복지겸(卜智謙) 등과 더불어 궁예(弓裔)를 폐하고 왕건(王建)을 추대해 고려가 창업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에 고려개국원훈(高麗開國元勳)으로 대장군(大將軍)에 올랐다.
어느 날 왕건이 평산으로 사냥을 나가 삼탄(三灘)을 지날 때이다. 마침 높은 하늘을 나르는 세 마리의 기러기를 보고, 왕건이 수행하는 여러 장수들에게 물었다. "누가 저 기러기를 쏘아 맞추겠는가?" 신숭겸이 맞추겠다고 아뢰었다. 왕건이 그에게 궁시(弓矢)와 안마(鞍馬)를 내리며 쏘라고 하였다. 그는 "몇 번째 기러기를 쏘리이까?" 하고 물었다. 왕건이 웃으며 말했다. "세 번째 기러기 왼쪽 날개를 쏘라!" 신숭겸이 과연 세 번째 기러기의 왼쪽 날개를 명중시켜 떨어뜨리자, 왕건이 탄복을 하였다. 그리고 기러기가 날던 땅 3백결을 하사하고, 본관을 평산으로 삼도록 하였다.
서기 927년 후백제는 군사를 이끌고 경주를 침범했다. 그러자 왕건은 신라를 도와 후백제과 싸우게 되었다. 왕건은 신숭겸과 정예병 5천명을 거느리고 후백제를 공격하였다.
드디어 고려와 후백제군이 오늘날의 팔공산인 공산의 미리사 부근에서 부딪쳤다. 병력이 열세였던 고려군은 대패하고 말았다. 왕건과 휘하의 장수들은 후백제군의 포위망을 뚫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웠다. 그러나 허사였다. 마침내 신숭겸은 국가의 장래를 위해, 태조 왕건과 자신의 외양이 닮은 점을 이용했다. 그래서 서로 갑옷을 바꿔 입고 태조를 탈출시킨 후, 스스로 적진을 향해 돌격했다. 후백제군은 신숭겸을 태조로 오인해 집중 공격을 가했다. 원보(元甫)· 김락(金樂)과 같이 힘을 합쳐 싸우다가 신숭겸이 장렬히 전사하자, 후백제군은 그의 목을 베어갔다.
평소 아우로 아끼던 신숭겸의 죽음을 슬퍼한 태조는 시신을 잘 보살펴 춘천에 예장하고, 벽상호기위태사개국공삼중대광의경대광위이보지절저정공신(壁上虎騎衛太師開國公三重大匡毅景戴匡衛怡輔砥節底定功臣)에 추봉하였다. 그리고 그의 아들 능길(能吉)과 보(甫)를 원윤(元尹)으로 삼고, 지금의 경북 달성군 공산면 지묘동에 지묘사(智妙寺)를 세워 명복을 빌었다.
이때 태조 왕건은 신숭겸의 공을 기려 후백제군이 베어간 그의 머리 대신에 순금으로 시신의 머리를 만들어 후하게 장례를 지냈다. 그리고 금으로 만들어진 그의 머리가 도굴될 것이 염려스러워 춘천, 구월산, 팔공산에 똑같은 묘를 만들게 했다고 전해진다.
특히 춘천의 서면 방동리의 묘역은 도선(道詵) 국사가 왕건을 위해 잡아준 자리였다고 한다. 그러나 왕건은 자신을 위해 기꺼이 죽음을 택한 신숭겸의 절의에 감동하여 그 자리를 선뜻 내주었다는 것이다. 특히 여기에는 똑 같은 봉분을 세 기나 나란히 만들어, 어느 것이 진짜 무덤인지 알 수 없도록 하였다.
신숭겸의 충절은 고려는 물론 조선시대까지 높이 기려졌다. 서기 1120년에는 고려의 예종이 서경(西京)에 행차해 팔관회를 주도하는 과정에서 「도이장가(悼二將歌)」를 지어, 김낙과 신숭겸의 공을 노래한 일이 있다.
평산 신씨는 조선시대 후반기에 세를 떨친 명문으로 상신(相臣) 8명, 대제학 2명, 공신 11명, 문과 급제자 186명을 배출하였다. 파계는 시조의 14대손에서 20개파로 나뉘었는데, 그 가운데 문희공파(文僖公派), 정언공파(正言公派), 사간공파(思簡公派)에서 많은 인물이 나왔다. 문희공파의 파조(派祖)는 신개(申개)이고, 정언공파와 사간공파의 파조는 신효(申曉)와 신호(申浩)이다.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맥을 살펴보면, 시조 신숭겸의 11세손 연(衍)의 아들 중명(仲明)은 도관(都官)을 지내고 병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자명(自明)은 봉익대부로 춘천부사를 역임하였으며, 헌주(憲周) 상호군을 역임하였다. 삼형제의 출현으로, 평산 신씨의 가세가 크게 융성하여 명문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중명의 아들 집평(執平)은 고려조에서 전리판서(典理判事)와 수문전대제학(修文殿大提學)을 지냈다. 그의 아우 군평(君平)은 공민왕 때 좌대언(左代言)과 어사대부(御史大夫)에 올라, 당대에 대학자로 추앙되었던 막내 현(賢)과 함께 명성을 떨쳤다.
집평의 셋째 아들 안(晏)은 고려 말에 봉선고판관(奉先庫判官)을 거쳐 종부시령(宗簿寺令)에 이르렀으나, 고려가 망하자 평산의 황의산에 들어가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지켰다. 그의 아들 개( )가 뛰어났다.
개는 국초 이래 명간관(名諫官)이라고 태종이 극찬했다. 태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檢閱)을 지내고, 태종 때 이조 정랑(吏曹正郎)·참의(參議)·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 등을 거쳤다. 세종 때는 이조판서가 되어 북변을 자주 침입하던 오랑캐 토벌에 공을 세웠다. 그 후 우참찬(右參贊)으로 『고려사』의 수찬에 참여했으며, 좌찬성과 우의정을 거쳐 궤장을 하사 받고 기로소에 들어갔다. 서기 1447(세종 29)년 좌의정에 올랐다.
본래 왕조의 기록인 실록(實錄)은 왕이 보는 것을 금하였다. 객관성이 흐려지고 왕의 세력에 좌우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어느 날 태조가 자신에 관한 기록이 궁금하여 실록을 보여 줄 것을 하명하였다. 이에 개는 완강히 거부하였다. 이 일은 뒷날 실록 열람을 원하는 임금들의 명을 거부하는 좋은 전례가 되었다. 그의 아들 자준(自準)은 관찰사를 역임하였고, 자승(自繩)은 대사성을 역임하였으며, 자형(自衡)은 집의를 역임하였다. 이들 삼형제는 후대에 훌륭한 인재를 많이 두어, 평산 신씨의 중추적인 인물이 되었다.
개의 아우로 태종 때 문과에 장원 급제한 효(曉)는 사간원우정언(司諫院右正言)을 거쳐, 세종 때 교수관(敎授官)을 지냈다. 그의 아들 영(瑛)은 김식(金湜)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는데, 중종 때 수원부사(水原府使)로 나가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의 추앙을 받았다.
군평(君平)의 손자로, 공양왕 때 지신사(知申事)를 역임한 호(浩)는 고려의 국운이 기울자 옥새를 부둥켜안고 이성계 일당에 항거했으나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고향인 평산으로 내려가 은거하였다. 태조가 전리판사(典理判事)의 벼슬을 내려주면서 수차에 걸쳐 조정으로 불렀으나, 응하지 않았다.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성균관 유생(儒生) 1천 여 명을 이끌고 대궐에 들어가 조광조(趙光祖)의 구명을 상소했던 명인(命仁)은 항상 울분을 품고 `풍류광객(風流狂客)`이라 자칭하며, 전국을 방랑하였다. 거창에 은거하던 스승 김식이 자결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달려가 시신을 거두어 충주에 장례를 지냈다.
당시에는 김식이란 이름만 입에만 올려도 역적으로 몰리던 때였는데, 그의 시신을 운반했던 명인의 용기에 세상 사람들은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장례 도중에는 「조송옥사(弔宋玉辭)」라는 애도시를 지어 자기의 뜻을 밝히고, 다시는 벼슬길에 나가지 않은 채 시주(詩酒)로 일생을 마쳤다.
명인의 아들 익(翌)은 명종 때 무과에 급제하여 함평현감(咸平縣監)으로 나가 치적을 쌓았다. 선조 때 제주목사(濟州牧使)·전라도병마절도사(全羅道兵馬節度使)·순천부사(順天府使) 등을 역임하였다.
익은 본래 남대문 밖 청파의 배다리 근처에 살았다. 하루는 그이 아버지 명인이 집 근처에서 길 건너 사람과 이야기를 하다가 당시 병조 판서 류전(柳琠)의 행차를 범하여 길잡이하는 하인에게 끌려가 곤욕을 당했다. 익은 모르고서 범한 일인데 너무 지나치게 욕을 보였다고 하여, 하인을 번쩍 들어 도랑에 내던졌다.
소란을 보고 있던 류전은 익을 장하게 보고는, 임금에게 대장부 하나를 발견했다고 아뢰었다. 이에 선전관(宣傳官)에 특채되었는데, 명종이 서교(西郊)에 나갔을 때이다. 거센 돌풍으로 어막(御幕)의 끈이 끊어졌는데, 익은 그 끈을 붙잡아 어막이 넘어지지 않도록 혼자 버티고 있었다고 한다.
개의 증손인 상( )은 어려서부터 성리학을 연구하여 조광조·이자(李 )와 더불어 뜻을 같이했으나, 그들의 과도한 혁신정치에 저항을 느껴 중도사상을 지녔다. 중후한 인격으로 추앙을 받았다. 일찍이 평안감사(平安監司)가 되었는데, 평산부(平山府)의 아관(衙官)을 지날 때는 본관 마을이라 하여 수레에서 내려 걸어갔다고 한다.
선조 때 명장으로 유명했던 립(砬)은 상의 손자이다. 서기 1583(선조 16)년 온성부사(穩城府使)가 되어 북면에 침입해 온 이탕개(尼湯介)를 격퇴시키고, 두만강을 건너 야인들의 소굴을 소탕하고 개선하였다. 선조 임금은 교외에까지 직접 마중을 나가, 전포에 핏자국이 나 있는 것을 보고 어의를 벗어주었다. 그리고 장군에게 혼기에 닥친 딸이 있는 것을 알고는, 자신의 넷째 아들 신성군(信城君)의 아내로 삼아주는 등 극진히 대해주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손수 립을 불러 보검을 내리며 왜군의 토벌을 당부하였다. 빈약한 병력으로 출전한 그는 충주의 탄금대(彈琴臺)에 배수진을 치고 적군과 대결하다 참패하자, 부하장 김여물(金汝 )과 함께 강물에 투신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립(砬)의 아들 3형제 중 장남 경진(景 )은 혼탁한 광해군의 난정을 개탄하고 인조반정(仁祖反正)을 주도해 공을 세웠다. 정사일등공신(靖社一等功臣)에 책록되었다. 나중에는 공조참의와 병조참판을 거쳐 병조판서에 올라, 훈련(訓鍊)·호위(扈衛)·포도(捕盜)의 3대장을 겸했다. 병자호란(丙子胡亂) 때에는 남한산성의 수비를 담당하였다.
특히 그는 `아버지가 투신해서 죽은 강의 물고기를 어찌 먹을 수 있겠느냐?` 하면서, 평생동안 물고기를 먹지 않았다고 한다. 우의정·좌의정을 거쳐 평성부원군(平城府院君)에 봉해지고, 영의정에 이르렀다. 정사이등공신(靖社二等功臣)에 봉해진 아우 경유(景裕), 동성군(東城君) 경인(景 )과 함께 의리와 절개의 무맥(武脈)을 이었다.
19세손인 개성도사(開城都事) 승서(承緖)의 아들 흠(欽)은 인조 때 영의정에 올라 정주학자(程朱學者)로 문명을 떨쳤다. 오늘날에도 이정구(李廷龜), 장유(張維), 이식(李植)과 더불어 조선 전기 4대 고문가(古文家)로 제일 먼저 꼽힌다. 글씨에도 일가를 이루어, 아우 감(鑑)과 함께 가문을 빛냈다.
인조로부터 `신하가 모두 이 사람 같으면 걱정이 없겠다!`고 칭찬을 받았던 감은 용양위부사직(龍 衛副司直)겸 춘추관기주관(春秋官記注官)이 되어, 앞서 임진왜란에 불타 없어진 『왕조실록』의 재간(再刊)에 참여했다. 남원부사(南原府使)와 강화부유수(江華府留守)를 역임했다.
흠의 아들 21세손 익성(翊聖)은 선조의 딸 정숙옹주(貞淑翁主)와 혼인하여 동양위(東陽尉)에 봉해지고, 광해군 때 폐모론을 반대하다가 초야로 쫒겨났다. 인조반정 후에 재등용되어,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으로 왕을 호종하여 청군(靑軍)과 계속 싸울 것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화의(和議)가 성립된 후에도 계속 척화를 주장한 `척화오신(斥和五臣)`중의 한 사람으로, 심양(瀋陽)에 붙잡혀 갔다.
흠의 손자이자, 익성의 아들인 최(最)는 효종(孝宗) 때 봉교(奉敎)로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을 겸하여 『인조실록(仁祖實錄)』 편찬에 참여했다. 문장에 능하여, 『해동사부(海東辭賦)』에 시부(詩賦)가 전한다.
흠의 손자이자, 참판 익전(翊全)의 아들인 정(晸)은 현종 때 춘당대문과(春塘臺文科)에 급제하여, 대사간을 거쳐 대사성을 역임했다. 숙종 때 좌우참찬(左右參贊)과 예조판서(禮曹判書)·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등을 지냈다. 시문(詩文)에 능하고 글씨에 뛰어났다.
흠의 손자이자, 익륭(翊隆)의 아들인 만(曼)은 17세 때 병자호란을 당하여 부모와 처를 데리고 강화(江華)에 피난을 갔다. 그 곳에서 어머니와 처 홍씨(洪氏)가 해를 입고 죽자 그 울분과 치욕을 가눌 길 없어 자결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아버지가 살아계신 까닭에 차마 죽지 못하고 있었는데, 난이 평정되었다.
그는 치욕을 몸에 입고는 한양의 성문 안으로 들어 설 수 없다고 하면서, 회덕(懷德)의 송촌(宋村)으로 송시열(宋時烈)을 찾아가 학업을 닦았다. 그리고는 부안(扶安)의 백연동(白蓮洞)과 진잠(鎭岑)의 구봉산(九峰山)에서 야인생활을 지속하였다. 뒷날 송시열이 입조(入朝)하여 나라의 중요한 기획에 만의 지혜를 참작하고자 여러 번 불렀으나, 도성 안에는 발을 들여놓지 않으면서 서신으로 정사에 참여했다.
전국 각처에 흩어진 학자들을 찾아 방랑하고 명소마다 찾아가 놀면서도 국정에 참여했으므로, `야인판서(野人判書)`로 불리었다. 그는 임종 때에도 `왜놈과 한 하늘에 살다 죽으니 지하에 가서 선친에게 고할 말이 없다`고 원통해하며 숨졌다고 한다.
철저한 배청숭명주의자인 민일(敏一)의 아들 상(尙)은 병자호란 때 왕족의 호위직을 맡아 강화도에 피난을 갔다. 적이 임박해오자 호위하던 신하들이 모두 도망갔는데도, 그는 혼자 세자빈을 지키고 있었다.
이 때 청병이 세자빈에게 접근하여 그들의 장군에게 배례시킴으로써 굴복의 예를 갖추도록 강요하였다. 표정 하나 흩트리지 않고 서있던 그는 세자빈의 시종에게 화구를 달구어 오라고 시켰다. 그리고 그것을 세자빈이 타고 있던 가마 속에 넣어주며 자결을 권하였다. 세자빈의 죽음을 확인한 다음, 자신도 뒤따라 자결할 작정이었다. 이 땅의 많은 부녀자들의 자결을 보아온 청병은 이에 겁을 먹고 굴욕 배례를 단념하였다. 그리고는 그저 신변만을 보호토록 하였다.
전쟁이 끝난 뒤, 정적들은 세지빈을 구제해낸 상에게 세자빈에게 죽음을 강요했다는 모략까지 곁들여 죄를 뒤집어씌우려 하였다. 상은 스스로 유배길을 택하여 원주로 내려가 초가 두 칸을 짓고 사람의 내왕을 사절했다. 그는 원주에서 『부음록』3권과 『휘언』두 편을 저술하여 후손에게 전했다고 한다. 상의 아들 명규(命圭)는 현종 때 집의를 역임하였는데, 직간(直諫)으로 당대 백성들의 속을 후련하게 했다고 한다.
그리고 예학의 거두였던 석학(碩學) 박세채(朴世采)에게 학문을 연마하여 서인으로서 숙종 때 대사헌(大司憲)에 올랐던 완(玩)이 있다. 그는 이조판서를 거친 뒤, 우의정(右議政)에 올랐다. 희빈(희嬪) 장씨(張氏)의 처벌을 주장했고 북한산성의 축조를 건의하여 왕의 승낙을 받았으나, 일부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영의정에 올라 평천군(平川君)에 봉해졌다.
영조 때 알성문과에 급제했던 만(晩)은 정자(正字)를 거쳐 실록청도청낭청(實錄廳都廳郎廳)이 되었다가, 정미환국(丁未換局)으로 소론이 득세하자 파직을 당했다. 다시 등용되어 이조(吏曹)와 호조(戶曹)의 판서를 역임하면서, 편수당상(編修堂上)으로 『천의소감』을 편찬했다.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을 지내고, 영중추부사(領中樞府使)에 이르렀다. 역시 영의정을 역임하고 기로소에 들어간 아우 회(晦)와 함께 가문을 대표했다.
그 밖의 인물로는, 숙종 때 봉상시첨정(奉常寺僉正)을 지내고 문장과 시문에 탁월했던 유한(維翰)과 영조 때 대사헌을 역임한 위(暐)가 유명했다. 어영대장(御榮大將)을 거쳐 공조참판을 지낸 대겸(大謙)과 청아한 문장과 서예로 명망이 높았던 작(綽)은 시서화에 능하여, 지금까지도 시서화 삼절(三絶)로 추앙받는 위(緯)와 함께 이름을 날렸다.
판관(判官) 광온(光蘊)의 아들 재식(在植)은 헌종 때 대제학을 역임하였다. 고종 때 지중추원사(知中樞院使)에 오른 명순(命淳), 좌의정 응조(應祖), 판삼군부사(判三軍府使) 헌(櫶), 판소리 대가 재효(在孝), 임오군란의 책임을 지고 임자도에 위리안치 되었던 정희(正熙), 비서원승(秘書院丞)과 동지돈령원사(同知敦零院事)를 지낸 두선(斗善), 대동학회장과 수학원장을 역임한 기선(箕善), 영남지방의 의병장으로 활약한 돌석(乭錫), 경북 의용단장 태식(泰植) 등이 명문의 가통을 지켰다.
한말에 와서 특히 가문을 빛낸 인물로 독립군 양성에 전력했던 팔균(八均)이 있는데, 토비의 습격을 받고 순절했다. 3·1절 기념방송 사건과 반동비밀결사의 고문으로 추대되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복역중 6·25 때 총살당한 석구(錫九)이외에도, 곡성 출신의 의병 정백(正栢), 내장사에서 재기를 도모하다가 사형 당한 덕균(德均), 광복회 초대회장 덕영(德永),『심경』이란 잡지를 발간하여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현구(鉉九), 광복군 참리부 내무사랑 우현(禹鉉)이 근대의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그리고 제헌국회의원에 당선되어 초대 부의장(副議長)을 지내고 민주국민당(民主國民黨) 최고위원과 민주당 대표최고위원으로 야당을 영도했던 익희(翼熙)가 있다. 그는 자유당 독재치하에 민주당 공천으로 대통령(大統領)에 출마하여 명문 평산 신씨의 가문을 더욱 빛냈다.
묘역의 상단에는 봉분 세 기가 가지런하다. 뒤로는 곡장이 크게 둘리었다. 비의 전면에는 `고려태사장절공신숭겸지묘`라고 쓰였다. 묘역은 서기 1976년에 강원도지방문화재 29호로 등록되었다.
더위에 지친 회원들이 묘역 뒷편의 곡장 아래 드리워진 그늘에 앉는다. 그리고 흐르는 땀을 닦으면서 전방을 구경한다. 통쾌하달 만큼 시원한 전방이다. 상쾌한 솔바람이 불어온다.
회원들이 앉아 쉬는 곳이 입수도두처이다. 두두룩하게 솟아서 용이 지닌 힘과 크기를 자랑하고 있다.
삼각봉인 북배산에서 내려온 용이니, 이곳의 혈은 유두혈로 분류된다. 곡장 뒤로 넘겨보면, 경사 40°가 넘을 정도로 몹씨 급하게 서둘러 내려온 용이다. 그러나 곡장에서부터는 여유만만하게 흘러내렸다. 그리고는 젖가슴 같은 묘역을 펼쳤다.
청룡과 백호는 모두 본신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청룡은 조금 거리를 둔 채 묘역을 감싸면서 전방의 논에까지 내려왔다. 백호는 바짝 붙어 급히 내려와 제각 즈음에 머물렀다.
지금도 무지하게 큰 명당이다. 좌우의 시야를 가리는 송림이 없다고 간주하면, 이를 데 없이 큰 명당이다. 그런데도 평탄하고 아늑한 모습이다. 논으로 이루어진 명당의 오른켠이 마을이다. 태평스런 농촌의 모습이다.
명당 끝으로는, 바깥 청룡과 백호가 만나는 수구처가 보인다. 두 산자락이 겹쳐서 꼭꼭 막은 교쇄의 형국이다. 명당 안에 그득 담긴 상서로운 기운이 전혀 빠져나갈 수 없다.
수구처 너머에 춘천 시가지가 보인다. 얼마나 큰 외명당인지, 춘천 시가지를 품에 안았다. 왼쪽으로 봉의산이 보인다. 시가지 뒤로는 오대산에서 봉의산으로 내려오는 장엄한 산세의 흐름이 보인다.
돌아보면, 주변의 산세들 역시 다소곳한 모습으로 묘역을 향해 다가들고 있다. 재상을 낳는다는 일자문성(一字文星)의 형상을 한 산들이 많다. 그런데 자세히 살피면 다섯 종류의 산세가 모두 보인다. 파도로 출렁이는 수성체(水星體), 불길로 타오르는 화성체(火星體), 뾰족한 목성체(木星體), 둥그스름한 금성체(金星體), 밋밋한 토성체(土星體) 등 오성체(五星體)가 골고루 찾아진다.
제왕의 자리가 되기 위해서, 오성체의 완비는 중요한 요건이다. 따라서 사격(砂格)이나 여러 가지 입지조건으로 보아, 태조 왕건이 자신의 신후지지(身後之地)로 찍어둔 이곳을 신숭겸 장군에게 사패지(賜牌地)로 내려주었다는 이야기는 상당한 신빙성을 지닌다.
이곳의 정확한 안산은 찾기가 힘들다. 도굴 방지책으로 세 봉분 중에 어느 곳이 진혈인지 알아낼 수 없도록 교묘하게 묘역을 꾸몄기 때문이다. 몇몇 회원들이 장난삼아 엘 로드를 꺼내 혈을 측정해본다. 동쪽의 봉분이 자리란다.
하나씩 살펴보면, 동쪽의 봉분은 바깥 백호의 끝단에 솟은 귀인봉을 안산으로 삼았다. 가운데 봉분은 봉의산 뒤쪽 멀리에 솟은 귀인봉이 안산이다. 서쪽 봉분은 봉의산이 안산이다.
향은 세 봉분 모두 대체로 술좌진향(戌坐辰向)이다. 물은 좌수도우(左水到右)해서 손사방(巽巳方)으로 빠진다. 88향법 가운데 정묘향(正墓向)에 속하는 향법이다.
정묘향은 좌수도우하고 우측에서 작은 물이 나와 양수협출(兩水陜出)해야 하며, 곤신파(坤申破)에 정미향(丁未向), 건해파(乾亥破)에 신술향(辛戌向), 간인파(艮寅破)에 계축향(癸丑向), 손사파(巽巳破)에 을진향(乙辰向)이 이에 속한다. 정묘향은 부귀를 불러오며, 자손들이 번창하고 건강 장수를 한다는 향이다.
☞.平山 申氏 항렬표
밀직공파, 봉상윤공파, 장령공파, 현령공파, 문희공파, 정언공파, 한성윤공파, 사간공파, 대제학공파, 온수감공파, 제정공파, 전서공파, 이상공파, 판사공파, 진사공파, 감찰공파, 판윤공파, 침판공파, 군수공파,
27세 : 광(光), 언(彦), 악(岳), 응(應), 일변(日邊)
28세 : 주(柱), 종(宗), 범(範), 성(成), 광(匡), 종(宗), 문(文)
29세 : 대(大), 석(錫), 영(泳), 명(命), 동(東), 선(善), 재(在)
30세 : 주(周), 한(韓), 상(相), 영(永), 진(鎭), 목변(木邊)
(31세 이전에는 파별로 따로 쓰였으나 이후에는 같이 쓰인다.)
31세 : 의(義), 환(煥), 희(熙), 수(秀), 태(泰),
32세 : 균(均), 규(圭), 노(老), 곤(坤), 현(鉉), 언(彦), 윤(允), 종(鍾), 철(澈), 식(湜),
순(淳), 영(泳)
33세 : 현(鉉), 언(彦), 윤(允), 종(鍾),,,,,,,,
34세 : 철(澈), 식(湜), 순(淳), 영(泳),,,,,,,,
35세 : 동(東), 상(相), 영(榮), 주(柱),,,,,,,,
36세 : 섭(燮), 용(容), 항(恒), 한(煥)
37세 : 재(載), 숙(璹), 기(基), 배(培),,,,,,,,
38세 : 호(鎬), 진(鎭), 익(謚), 련(鍊)
39세 : 제(濟), 로(濬), 원(源), 홍(洪),
40세 : 근(根), 화(和), 병(秉), 집(集), 성(性), 충(忠), 찬(燦), 덕(德), 용(用), 익(翼),
중(重), 식(軾), 원(元), 완(完), 극(棘), 욱(旭), 필(弼), 우(雨), 남(南), 설(卨),
단(段), 승(承), 제(齊), 녕(寧), 무(武), 빈(斌), 성(成), 무(茂), 홍(弘), 세(世),
경(卿), 기(起), 염(廉), 용(庸), 경(慶), 강(康), 재(宰), 화(華), 상(常), 행(幸)
41세 : 성(性), 충(充), 찬(燦), 덕(德),,,,,,
42세 : 용(用), 익(翼), 중(重), 식(軾),,,,,
43세 : 원(元), 완(完), 극(棘), 욱(旭),,,,,,
44세 : 필(弼), 우(雨), 남(南), 설(卨)
45세 : 단(段), 승(承), 제(齊), 녕(寧),,,,,,
46세 : 무(武), 빈(斌), 성(成), 무(茂)
47세 : 홍(弘), 세(世), 경(卿), 기(起),,,,,,
48세 : 염(廉), 용(庸), 경(慶), 강(康)
49세 : 재(宰), 화(華), 상(常), 행(幸),,,,,,
50세 : 정(廷), 승(升), 연(延), 성(聖),
51세 : 규(揆), 등(登), 계(癸), 봉(奉)
五行相生法(오행상생법) 항렬자를 씁니다. 오행의 근본인 金·水·木·火·土 순서
공산전투와 지명이름
팔공산주변의 지명은 공산전투로 인하여 이름이 정하여 진 곳이 많다.
자료에 의하면 은해사 입구가 첫 조우지라고 하는데 바로 이곳이 태조지이다.
또한 숙천에 있는 초례봉은 신의 도움으로 이기고자 제를 올렸다는 뜻의 봉우리이고,
신숭겸장군 유적지 표충단은 왕건을 대신해 죽은 신숭겸과 그 휘하 군졸을 기념하기 위한 곳이고,
오늘날 마을 이름 지묘는 신장군의 명복을 빌기 위해 지어준 절 이름 지묘사에서,
그뒤 왕산(유적지 뒷산)은 왕건이 피해 달아났다는 뜻에서, 멀리 팔공산 염불암 뒤 일인석은 그가 도망가다가 쉬었다는,
다시 아래로 내려와 파계사와 동화사로 갈라지는 파군재는 고려군사가 패했다는 ,
봉무동에 있는 작은 바위 독좌암은 혼자 앉았다는,
불로동 옛 이름 해안은 도망가다가 잠시 얼굴을 풀었다는,
평광동 시량리는 나무꾼이 왕을 잃은 곳, 즉 실왕 했다는 뜻에서 지어진 이름들이다.
어느덧 사지에서 많이 벗어나 하늘을 쳐다보니 반달이라 반야월,
그래서 마음을 놓으니 안심이요, 그래도 못 믿어 더 나아가니 날이 밝은데
맑은 개울이 있자 청천이라 불렀다는 것이다.
'살내'와 염불암 뒤에 있는 '일인석', 불로동의 옛 이름
'해안'은 긴장을 풀었다는 해안, 쏜 화살이 내를 이루었다는 전탄,
또한 무태는 왕건이 이 마을 앞을 지날 때 게으른 사람 없이
모두 부지런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고,
휘하 병사들에게 게으름 피우지 말고 경계를 강화하라고 무태라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연경은 지나가는 밤에 글 읽는 소리가 낭랑하여,
동화천과 금호강이 만나는 곳 일명 살내는 왕건군사와 견훤군사가 쏜 화살이 내를 이루어서 붙여진 이름으로 전한다.
팔공산, 앞산 계곡 어디에도 왕건의 얼이 스며 있지 않는 곳이 없다.
따라서 대구일원은 당시 승자였던 견훤에 관한 고사는 없고
패자였던 왕건에 관한 전설만 가득하니 정권을 창출하지 못한 원인이 아닐까!
그러나 왕건이 구사일생하여 오백년 고려를 이룩하게 한 신숭겸 장군의 거룩한 희생과 충절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평산신씨 문희공파 대표적 인물
평산 신씨는 조선후기에 세력을 떨쳐 조선의 대표적인 명벌(名閥) 가문(家門)이다.
평산신씨 파계는 시조의 15대손에서 19개파로 갈리는데,
문희공파(文僖公派)가 30%, 사간공파(思簡公派)가30%, 제정공파(齊靖公派)가 25%를 차지한다.
평산 신씨는 조선 후반기에 세를 떨친 명문으로 상신(相臣:영의정,좌의정,우의정) 7명
대제학(홍문관과 예문관의 장) 5명, 판서 20명, 문과 급제자 302명을 배출했다.
그중 평산신씨 인물중 60% 가 문희공파(文僖公派)에서 나왔으며 정언공파(正言公派)」사간공파(思簡公派)에서 많은 인물이 나왔다.
문희공파는 문신(文臣)과 무신(武臣)의 인물이 혼재하며 평산신씨 문희공파로 대중적으로 알려지고 이름난 사람이 있으니 바로 신립장군, 신사임당과 현대인물로는 신익희, 신돌석 장군등이 모두 문희공파이다.
평산신씨 7명의 상신중 3명이 문희공파 출신이다.
1.문희공파 시조이며 세종조 명재상으로 세종묘정에 배향된 좌의정 신개(申槩)
2.조선시대에 무과출신으로 영의정에 오른 경진(景禛)
3. 북한산성 축성한 영의정 완(琓)
1. 문희공파 주요인물을 보면 문희공파 시조이신 신개(申槩)는 조선 세종때 예문관 대제학과 좌찬성을 거처 세종때 명재상으로 소문난 황희, 맹사성과 함께 우의정, 좌의정에 올랐으며 궤장(几杖 )을 하사 받았다. 졸 한후 세종의 태성성대를 이루는데 큰 공을 세워 종묘에 있는 세종묘정에 배향되였다.
2. 임진왜란때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친 것으로 유명한 신립장군의 아들로 조선시대 무관출신으로 영의정에 오른 두명 중 한사람이 신경진(申景禛)이다
3. 숙종때 장휘빈의 처벌을 완화하는 것을 주청하였고 시무(時務) 8조를 올렸으며 북한산성의 축성을 건의하여 윤허를 받은 영의정 신완(申琓)
문희공과 후손 정시록(廷諡錄) 및 관직(官職)
1. 정시록(廷諡錄)
칭 호 |
자 |
자 |
세 |
시 호 | |
문희공 |
개 |
槩 |
15 |
勤學好問曰 文 |
小心畏忌曰 僖 |
문절공 |
상 |
鏛 |
18 |
忠信愛人曰 文 |
好兼自克曰 節 |
정청공 |
명인 |
命人 |
18 |
不隱無屈曰 貞 |
避遠不義曰 淸 |
충헌공 |
잡 |
磼 |
20 |
臨難不忘國曰 忠 |
行善可紀曰 憲 |
충장공 |
립 |
砬 |
20 |
危身奉上曰 忠 |
死于原野曰 壯 |
충익공 |
경진 |
景禛 |
21 |
危身奉上曰 忠 |
知盧深遠曰 翼 |
경의공 |
경유 |
景裕 |
21 |
由義以齊曰 景 |
剛而能斷曰 毅 |
충도공 |
경인 |
景禋 |
21 |
危身奉上曰 忠 |
心能制義曰 度 |
충정공 |
준 |
埈 |
21 |
危身奉上曰 忠 |
寬要令終曰 靖 |
장무공 |
여철 |
汝哲 |
23 |
武能持重曰 莊 |
剛强直理曰 武 |
문장공 |
완 |
琓 |
24 |
忠臣接禮曰 文 |
履正志和曰 莊 |
효목공 |
대현 |
大顯 |
27 |
慈惠愛親曰 孝 |
剛而能斷曰 毅 |
정무공 |
명순 |
命淳 |
29 |
淸白自守曰 貞 |
折衡禦侮曰 武 |
효정공 |
억 |
檍 |
30 |
慈惠愛親曰 孝 |
淸白守節曰 貞 |
장숙공 |
헌 |
櫶 |
30 |
武能特重曰 莊 |
執心決斷曰 肅 |
정익공 |
정희 |
正熙 |
31 |
寬樂令終曰 靖 |
思慮深遠曰 翼 |
2. 상신(相臣)
칭 호 |
자 |
자 |
세 |
관 직 |
문희공 |
개 |
槩 |
15 |
좌의정 |
충익공 |
경진 |
景禛 |
21 |
영의정 |
문장공 |
완 |
琓 |
24 |
영의정 |
3.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칭 호 |
자 |
자 |
세 |
관 직 |
충헌공 |
잡 |
磼 |
20 |
병조판서 |
장무공 |
여철 |
汝哲 |
23 |
형조판서 |
장숙공 |
헌 |
櫶 |
30 |
형조판서 |
4. 판서(判書)
칭 호 |
자 |
자 |
세 |
관 직 |
문절공 |
상 |
鏛 |
18 |
이조판서 |
충헌공 |
잡 |
磼 |
20 |
병조판서 |
충정공 |
준 |
埈 |
22 |
형조판서 |
효목공 |
대현 |
大顯 |
26 |
형조판서 |
정무공 |
명순 |
命淳 |
29 |
형조판서 |
효정공 |
억 |
檍 |
30 |
공조판서 |
정익공 |
정희 |
正熙 |
31 |
형조판서 |
5. 한성판윤(漢城判尹)
칭 호 |
자 |
자 |
세 |
관 직 |
규정공 |
후재 |
厚載) |
24 |
한성판윤 |
6. 참판(參判)
자 |
자 |
세 |
관 직 |
경호 |
景琥 |
21 |
형조참판 |
후명 |
厚命 |
24 |
병조참판 |
광하 |
光夏 |
25 |
공조참판 |
방 |
昉 |
26 |
이조참판 |
대승 |
大升 |
27 |
예조참판 |
대우 |
大羽 |
27 |
호조참판 |
대겸 |
大謙 |
27 |
공조참판 |
대응 |
大膺 |
28 |
병조참판 |
숙 |
橚 |
30 |
병조참판 |
환 |
桓 |
30 |
병조참판 |
7. 장신(將臣)
자 |
자 |
세 |
비 고 |
경진 |
景禛 |
21 |
영의정 |
경원 |
景瑗 |
21 |
총융사겸 포도대장 |
경인 |
景禋 |
21 |
어영대장 |
경호 |
景琥 |
21 |
한성판윤 |
준 |
埈 |
22 |
형조판서 |
여철 |
汝哲 |
23 |
형조판서 |
광하 |
光夏 |
25 |
공조참판 |
대현 |
大顯 |
27 |
형조판서 |
대겸 |
大謙 |
27 |
공조참판 |
홍주 |
鴻周 |
28 |
병조참판 |
동 |
絧 |
28 |
|
명순 |
命淳 |
29 |
형조판서 |
헌 |
櫶 |
30 |
형조판서 |
환 |
桓 |
30 |
병조참판 |
석희 |
奭熙 |
31 |
경무사(警務使) |
정희 |
正熙 |
31 |
한성부윤 |
8. 방백(方伯)
자 |
자 |
세 |
비 고 |
자준 |
自準 |
16 |
대사성 |
응희 |
應熙 |
31 |
관찰사 |
9. 공신(功臣)
자 |
자 |
세 |
비 고 |
잡 |
磼 |
20 |
병조판서 |
경진 |
景禛 |
21 |
영의정 |
경유 |
景裕 |
21 |
병마사 |
경인 |
景禋 |
21 |
어영대장 |
경원 |
景瑗 |
21 |
총융사 포도대장 |
준 |
埈 |
22 |
형조판서 |
10. 순절(殉節)
자 |
자 |
세 |
비 고 |
립 |
砬 |
20 |
도순변사(都巡邊使) |
길 |
|
20 |
|
급 |
石業 |
20 |
|
경지 |
景祉 |
21 |
|
경일 |
慶一 |
21 |
|
천남 |
天男 |
21 |
|
11. 증의정(贈議政)
자 |
자 |
세 |
비 고 |
화국 |
華國 |
19 |
|
잡 |
磼 |
20 |
|
립 |
砬 |
20 |
|
준 |
埈 |
22 |
|
해 |
垓 |
22 |
|
여정 |
汝挺 |
22 |
|
12. 유일(遺逸)
자 |
자 |
세 |
비 고 |
석번 |
碩蕃 |
22 |
|
조선 왕실과의 인척관계
광평대군(세종의 오남)정비 영가부부인 평산 신씨
덕천군(정종의 서자)사위 신갑지
희령군(태종의 서자)계비 평산군부인 평산 신씨
후령군(태종의 서자)비 무안군부인 평산 신씨, 사위 신정
영해군(세종의 서자)정비 임천군부인 평산 신씨
무산군(성종의 서자)정비 군부인 평산 신씨
견성군(성종의 서자)정비 영양군부인 평산 신씨
신성군(선조의 서자)정비 군부인 평산 신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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