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고무신 부부

№. 전주 한옥마을/경기전 2018/08/25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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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주 한옥마을/경기전 2018/08/25

백고무신 부부 2018. 8. 27. 11:32

전주 한옥마을

 

모악산 등반 후 잔여시간대에 전주 한옥마을에 도착

 

 

 

한옥마을 둘러보기로 합니다.

 

 

 

우선 느낌은 전체 분위기가 어딜가나 대동소이하지만 여기도 예외는 아닌 듯

 

 

 

많은 상인들만 북적이네요.

 

 

 

그래도 여기저기 둘러보면서

 

 

 

 

 

전주 한옥마을 유래 :

을사늑약(1905)이후 대거 전주에 들어오게 된 일본인들이 처음 거주하게 된 곳은 서문 밖, 지금의 다가동 근처의 전주천변이었다.

서문 밖은 주로 천민이나 상인들의 거주 지역으로 당시 성안과 성 밖은 엄연한 신분의 차이가 있었다.

성곽은 계급의 차이를 나타내는 상징물로 존재했던 것이다. 양곡수송을 위해 전군가도(全郡街道)가 개설(1907)되면서 성곽의 서반부가 강제 철거 되었고, 1911년말 성곽 동반부가 남문을 제외하고 모두 철거됨으로써 전주부성의 자취는 사라졌다.

이는 일본인들에게 성안으로 진출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으며, 실제로 서문 근처에서 행상을 하던 일본인들이 다가동과 중앙동으로 진출하게 되었다. 이후 1934년까지 3차에 걸친 시구개정(市區改正)에 의하여 전주의 거리가 격자화되고 상권이 형성되면서, 서문일대에서만 번성하던 일본 상인들이 전주 최대의 상권을 차지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상황은 1945년까지 지속되었다.

1930년을 전후로 일본인들의 세력 확장에 대한 반발로 한국인들은 교동과 풍남동 일대에 한옥촌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이는 일본인 주택에 대한 대립의식과 민족적 자긍심의 발로였다. 1930년대에 형성된 교동, 풍남동의 한옥군은 일본식과 대조되고 화산동의 양풍(洋風) 선교사촌과 학교, 교회당 등과 어울려 기묘한 도시색을 연출하게 되었다.

오목대에서 바라보면 팔작지붕의 휘영청 늘어진 곡선의 용마루가 즐비한 명물이 바로 교동, 풍남동의 한옥마을인 것이다.

 

경기전으로 방향을 돌립니다.

 

경기전은 현존하는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모신 곳

 

 

태조 이성계의 어진상

 

 

태조 이성계의 어진이 있는 문화재라 웅장한면을 기대했는데

 

 

다소 소박하네요.

 

 

우리나라 4대문 같이 웅장하고 궁궐 같은 면은 없고

 

 

왠지 고택에 온듯

 

 

문화재로서의 보존성이 다소 희석된것도 같고

 

 

어쨋든 보존성이 불안하고 어두워 보였습니다.

 

 

문화재로서의 가치를 더 높이고 관리를 좀 더 잘 했으면 하는

 

 

아쉬움도 남고

 

 

 

 

 

 

 

 

 

 

 

 

 

 

 

 

보물 제1578. 경기전은 1410(태종 10)에 창건되었다. 1409(9)에 태조의 관향인 완산부(전주)에서 태조 어진을 봉안하기를 청함에 따라 경주 어용전(집경전)의 어진을 모사하여 이듬해 경기전을 완공하고 정전에 어진을 모셨다. 경기전의 본래 이름은 어용전(御容殿)이었다. 1412년에 태조진전이라 고쳐 부르게 되었으며, 1442(세종 24)에 지금과 같이 경기전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그 해 9, 전국적으로 진전의 대대적인 중수가 이루어지는데 경기전도 이때 중수하여 이듬해 10월에 공사를 완료하였다. 그러나 경기전은 정유재란 때 소실되었고 그 후 1614(광해군 6)에 경기전을 중건하고 전란을 피해 이안하였던 어진을 다시 모셨다. 조선왕조실록 기사를 보면 경기전은 철종 5년과 7년에 수리가 있었다. 고종 연간에도 수차례의 공사가 이루어졌으며. 특히 1872(고종 9)에 어진을 새롭게 모사하여 다시 모시면서 대대적으로 중수가 이루어졌다.

이때 정전 내 어진을 모시는 침실(寢室)의 바닥을 온돌에서 대청으로 바꾸고 부식된 기둥 2개도 교체하였다. 번와와 단청도 새롭게 하였다. 당시 공사는 4개월 정도 소요되었는데 조경묘경기전수리등록(肇慶廟慶基殿修理謄錄)(1872)에 공사내용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