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여! 백 고무신
조선시대 천하를 뒤흔든 멋진 의적들 본문
전우치(田禹治)
전우치(田禹治)는 역사상에 있었던 실존인물로 그에 관한 도술설화가 항간에 널리 전하여 왔는데 그는 특히 환술에 능했던 술객으로 유명하다 이러한 설화들은 전우치가 생존했던 무렵부터 선비들에 의하여 문헌에 기록되었다 田禹治傳은 역사적인 사실들을 근거로 하여 전설이 이루어지고 더 나아가 소설로 발전되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본관 남양(南陽). 송도(松都) 출생. 중종 때 서울에서 미관말직을 지내다가 사직하고 송도에 은거하며 도술가(道術家)로 널리 알려졌다. 하루는 신광한(申光漢)의 집에서 식사 중 입에 넣은 밥알을 내뿜자, 그것이 각각 흰나비로 변하여 날아갔다고 한다. 또 가느다란 새끼 수백 발을 던지고 동자(童子)를 시켜 하늘에 올라가 천도(天桃)를 따오게 했다고 한다.
백성을 현혹시켰다는 죄로 신천옥(信川獄)에 갇혀 옥사했는데 뒤에 친척들이 이장하려고 무덤을 파보니 시체 없이 빈 관만 남아 있었다고 한다. 《오산집(五山集)》에 의하면 그가 차식(車軾)을 찾아가 《두공부시집(杜工部詩集)》 1질(帙)을 빌려갔는데 그때는 이미 죽은 지 오랜 후였다고 한다.
하려고 무덤을 파보니 시체 없이 빈 관만 남아 있었다고 한다.
[전우치 관련]
『태인(太仁)』고을이름의 의미
태인동 옛 지명이 문헌에 처음 나타난 것은 서기 1451년에 편찬된 고려사(권51)에 광양현(光陽縣) 대안도(大安島)라 기록되어 전하며, 곧이어 서기 1454년에 간행된 세종실록지리지 해도조편에 태안도(泰安島)라고 기록되어 있고, 서기 1530년경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다시 대안도(大安島)라고 적고 있다.
문헌 기록상 태인도(太仁島)라는 지명이 처음 등장한 것은 1740년경에 간행된 해동지도이며, 1861년에 쓰인 명세궁 수세록에도 태인도(太仁島)로 나오는데 전문가 들이 여러기록을 종합하여 검토한 바에 의하면 대안도(大安島)·태안도(泰安島) 는 태인도(太仁島)와 같은 지명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한편 1983년도에 편찬된 광양군지에 의하면 태인도(太仁島) 유래는 술객 전우치(田禹治)가 도술을 부려 이곳에 궁궐을 짓고 지방 수령의 탐학을 징계하고 빈곤에 시달리는 백성을 구했다는 전설에 의거 전우치(田禹治)를 가리켜 '大人'이라 하여 처음에는「大人島」라 불렀다고 기록되어 전한다.
그런데 전우치(田禹治)란 인물은 문헌상 검토한 바에 의하면 전설적인 인물이 아니고 역사상 기록되어 전하는 실존 인물로서 태안도(泰安島)라고 기록된 세종실록지리지 편찬 이후의 인물이며, 대안도(大安島)라고 기록된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경)간행 때는 전우치(田禹治)는 이미 사망한 때이다.
그러나 도술가 전우치(田禹治)에 관한 이야기가 태인동을 비롯한 금호동·광영동·골약동에 걸쳐 여러 가지 전설로 묻어 있어 무시할 수 없는 사안이라 사료된다. 그리고 태인도의 중심산이 근년의 지도에는 삼봉산(三峰山)으로 표기되어 있는데1899년에 편찬된 돌산군지에는 대인산(大人山)이라고 적고 있다. 돌산군지의 설명편에 의하면 태인도는 당초에는 돌산군의 북쪽에 있어서 북면(北面)이라 했으나 그 뒤 태인면(太仁面)으로 바꿨으며 아홉섬이 속해 있다고 기록되어 전한다. 또한 太仁島를 인호도(仁湖島)라고 쓰기도 하는데 섬이라고 하지만 광양만의 안쪽에 위치하여 바다를 호수로 보고 아름답게 쓰려는 의도에서 멋을 부려 명명(命名)한 것으로 사료되며 길도(吉島)를 길호도(吉湖島)·금도(金島)를 금호도(金湖島)로 한 것도 같은 경우라고 생각된다. 이상 문헌상으로 검토한 바에 의하면 '태인(太仁)'의 의미는 태안(泰安)·대안(大 安)등의 지명과 함께『크다』는 의미가 맥을 이어오고 있으며 '인(仁)'은 '어질다, 자애롭다'는 뜻이 담긴 유교의 근본 개념을 나타내는 말로 광양읍의 인서리(仁西里)·인동리(仁東里)·옛 인덕면(仁德面)의 지명 유래와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太仁'의 의미는「어진 사람들이 사는 큰 고을」란 뜻이 담겨져 있다고 할 수 있다.
검계(劍契)와 살주계(殺主契)
홍길동ㆍ임꺽정ㆍ장길산과 달리 17세기에 등장한 비밀결사체인 검계劍契와 살주계殺主契는 실존한 의적이었다. 17세기 조선에서는 서울을 중심으로 한 비밀조직들. 이것은 이들의 출신성분이 노비라는 사실과도 관련이 있다고 하겠다. 다시 말해 화적들은 대부분이 농촌사회에서 발붙일 것이 없어 고향을 등지고 각지를 전전하고 있던 유민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현실적인 호구지책의 해결을 최우선 과제로 삼아 투쟁하였다. 반면에 검계나 살주계 조직도 호구지책을 해결해야 하는 과제는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이 들은 기본적으로 '노비'라는 최하층의 신분이었기 때문에 자신들의 투쟁의 목표를 신분제의 굴레라는 사회구조의 모순을 타파하는 데로 모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실을 세밀히 관찰해보면, 두 조직 사이에는 미미해 보이나 그 지향하는 바에 있어서 중요한 차이가 있는 것이다. 한편 이들 조직의 주축이 된 향도계의 '향도'의 본래 의미는 미륵불이 다스리는 세계, 즉 만민이 평등하게 살아가는 세상을 뜻하고 있었다는 점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미륵신
앙과의 연관성을 생각해볼 수 있는 대목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검계와 살주계는 겉으로는 명화적과 크게 다를 바가 없지만, 신분제도의 모순이 질곡의 현실세계를 타파하고 신분해방을 추구하는 결사체로서의 성격을 보다 강하게 지니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1. 검계(劍契)는 조선 후기 경제적 부는 있으나 출세길은 막혀있었던 조선시대 양반의 서얼 출신들과 중인 계급 사람들이 주축이 된 조직입니다.
조선 후기의 폭력 조직으로, 원래 장례 비용을 충당할 목적으로 결성한 향도계(香徒契)에서 비롯하였다. 이때 향도계는 장례 비용을 충당할 목적으로 결성한 계이다. 무리를 모을 때 사람이 착하고 악함을 보지 않았는데, 어느 때에 형세에 의지하여 상여를 멜 때 소란을 피우고 폭력을 휘두르다 보니 자연히 도가(都家, 계를 맡는 집)에서는 그들을 숨겨주는 역할을 하게 되었고, 그렇게 도가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무리가 바로 검계라고 하였다. 살략계(殺掠契) 또는 홍동계(鬨動契) 등으로 불렸다. 살주계(殺主契)와 비슷한 시기에 나타난 반양반 조직이기 때문에 함께 거론하는 때가 많으나, 서로 다른 조직으로 본다.
《조야회통》과 《숙종실록》에 따르면, 1684년(숙종 10년) 초에 왜의 국서가 온 뒤로 소란이 날로 심해져 동대문으로 나가는 피난민이 줄을 잇게 된다. 이 왜의 국서는 대마도주가 1683년 12월에 보냈는데, 그 내용은 명이 망한 뒤 대만을 근거로 삼던 반청 운동 세력 정금(鄭錦)이 조선으로 쳐들어온다는 것이었다. 이 근거 없는 말이 조야에 퍼지면서 서울이 어수선해진다.
그 뒤 어떤 때는 검계의 당원들이 모여 한밤중에 남산에 올라가 태평소를 불어 마치 군사를 모으는 것같이 하고, 어떤 때는 중흥동에 모여 진법을 익히는 것같이도 하였다. 그에 따라 그해 2월 12일 서울 시내의 무뢰배가 결성한 검계가 습진(진법을 익히는 군사 훈련)을 하여 서울 시민에게 공포감을 조성하고 있으니 처벌해야 한다고 좌의정 민정중(閔鼎重)이 주장한다.
검계로 추정되는 작품 (삿갓 쓴 자)
2. 살주계는 그 구성원들 및 성격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목내선이란 사람의 종이 가입했다가 발각되어 살해당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선 주로 사회에 불만을 품은 하층민들로 구성된 조직으로 추정됩니다.
그러나 이들 역시 민중저항을 위한 비밀결사라기 보단 약탈을 주로 일삼는 범죄조직입니다. 포도청에서 살주계 조직원들을 체포하고 살주계의 책자를 얻었는데 살주계의 약조에는 '양반 살해' , '재물약탈', '부녀자겁탈'이 있었다고 합니다. 즉 양반을 살해한뒤 그 재물을 약탈하고 부녀자를 겁탈하는 흉악한 살인 강도 조직이였습니다.
살주계에 대한 검거가 실행되자 살주계 작당들이 남대문과 고위관료 집에 "만약 우리가 모두 죽지 않는다면, 끝내 너희들 배에 칼을 꽂고 말리라:"라는 협박문을 붙인 사건으로도 유명합니다.
[검계.살주계(劍契殺主契)사건]
숙종 때 정체불명의 일단의 무리들이 남대문과 대간의 집에 벽보를 붙여 "우리들이 모두 죽지 않는 한 끝내는 너희들 배에 반드시 칼을 꽂으리라"는 섬뜩한 말을 공개적으로 천명한 사건이 일어나 조정 안팎이 발칵 뒤집혔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위협이 아니었습니다. 숙종 무렵에는 서울을 중심으로 베일에 싸인 비밀조직들이 양반들을 공격하여 인명을 살상하고 재물을 빼앗는 일이 적지 않게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이들 조직들은 점차 검계와 살주계라는 이름의 비밀결사로 알려졌습니다. 그 조직의 이름부터 무시무시하고 심상치 않았습니다. "검계"에는 자신들의 문제를 검, 즉 무기를 이용해 일거에 해결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 담겨 있고, 더욱이 '살주계'는 글자 그대로 자신들의 상전을 죽이려는 자들의 모임이라는 뜻입니다. 이로 보아 지배층을 공포에 떨게 했던 검계나 살주계의 조직원들은 최하층의 신분인 노비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었음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 사건은 1684년(숙종 10) 일본에서 보낸 온 국서의 내용에 관한 소문이 퍼지면서 인심이 흉흉해진 틈을 타서 검계라는 계를 조직하여 만행을 저질렀던 사건입니다. 국서의 내용은 1년 전인 1683년 12월 대마도주가 보낸 것이었는데, 그 내용은 명나라가 청에 멸망당한 후 대만에 근거를 두고 반청 저항운동을 벌이고 있던 정금이 조선으로 쳐들어온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근거 없는 말이 퍼지면서 조정이 발칵 뒤집혔고, 피난을 가기 위해 성을 빠져나가는 자가 줄을 이으면서 백성들 사이에 큰 혼란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이런 난리판에 무뢰배들이 모여 살주계 또는 검계라는 계를 조직하여, 작당을 해서 피란인의 재물을 약탈하고 인명을 해치기도 하였던 것입니다.
이에 조정에서는 이들을 체포하도록 명을 내렸으나 이후 약 7개월간 붙잡힌 검계·살주계의 계원은 10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들은 모두 창포검을 소지하고 있었고 이들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계의 계칙을 적은 책자를 발견하였는데, 그 계칙에는 양반을 살육할 것, 부녀자를 겁탈할 것, 재화를 약취할 것 등이 적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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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대 출신이나 도당을 모아 1687년(숙종 13)경부터 세력을 늘리며 활동하였다.
1692년 관군의 토벌로 양덕일대로 이동하였고, 후에는 함경도 서수라등지에서 활동하며 마상을 가탁한 군대 5,000과 보병 1,000여 명을 거느린 큰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함경도뿐만 아니라 평안·강원도에서도 활동하였던 그의 부대는 한때 서울의 서얼 출신 이영창, 금강산의 승려 운부와 손을 잡고 승려세력과 함께 봉기, 서울로 쳐들어갈 계획이었다고 한다. 운부가 북쪽에서 인삼을 가져다가 군자금으로 사용한 점 등 상업활동을 벌인 점이 특징적이다. 조정에서는 그를 잡으려고 여러 차례 노력했지만 그는 끝내 잡히지 않았다. 장길산 사건은 17세기 이후 어려워진 사회조건 속에서 기층민인 서얼·승려·농민 등이 결합하여 새로운 왕조를 창립하려고 한 모반사건의 하나였다.
임꺽정 [ ?~1562 ] 조선시대의 의적(義賊).
일명 거정(巨正). 양주(楊州)의 백정(白丁)이었으나 정치의 혼란과 관리의 부패로 민심이 흉흉해지자 1559년(명종 14) 불평분자들을 규합, 황해도와 경기도 일대에서 창고를 털어 곡식을 빈민에게 나누어 주고 관아를 습격, 관원을 살해했다. 한때는 개성(開城)에 쳐들어가 포도관(捕盜官) 이억근(李億根)을 살해하기도 했다.
백성들의 호응으로 관군(官軍)의 토벌을 피했으나 1560년 형 가도치(加都致)와 참모(參謀) 서림(徐林)이 체포되어 그 세력이 위축되다가 1562년 토포사(討捕使) 남치근(南致勤)의 대대적인 토벌로 구월산(九月山)에서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명종실록(明宗實錄)》에는 그의 이름이 임거질정(林巨叱正)으로 적혀 있다.
홍길동[1440~1510 ] 전라도 장성현 아차곡 (오늘날의 장성군 황룡면 아곡1리 아치실)
서얼의 관리등용을 금지 하는 경국대전의 반포로 과거시험을 포기하고
집을 떠나 나주목 관할 장성현, 갈재를 중심으로 활동하다가 광주 무등산, 영암 월출산에 본거지를 정하고 주로 탐관오리와 토호의 재산을 빼앗아 가난한 백성에게 나눠주는 의적 활빈 활동을 하였다.
그후 지리산 근처의 경상도 하동군 화계현 보리암자에 지휘부를 두고 관군과 대항하였으며, 멀리 경상도 진주에까지 세력을 펼쳤다. 그후 김천 황악산에 들어가 학조대사에게서 병법과 무술을 배웠다.
장영기(張永己)라는 이름으로 변성하였으며, 전국 팔도(八道) 시장에 정보원(첩자)를 파견하여 민심을 파악하였다. 그러던 중 1469년(예종 1년) 10월 정부의 대대적인 토벌작전으로 활동 무대를 서남해안의 섬으로 옮기게 된다.
관군에 좇겨 1469년 11월 중순에 전라도 영광 다경포(현재의 법성포)근처의 영평곶에서 배를 타고 나주 압해도(신안군 압해도)쪽으로 활동 근거지를 옮기게 된다.
이로써 활동범위가 육지에서 바다로 바뀌게 되는데, 이는 훗날 뱃길로 3천리나 떨어진 일본 오키나와에 율도국이라는 해상왕국을 건설하는 계기가 된다. 특히, 이 시기에는 집단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직접 농사도 짓고 염전을 경작하고 어업활동을 했으며 상업활동까지 영위하면서 부패한 정부와 관료를 상대로 반봉건 투쟁을 벌였다.
*1470년(성종 원년) 관군의 집요한 토벌작전을 피하기 위하여 가짜 홍길동을 내세워 체포당하게 하는 계약을 꾸민 홍길동 집단은 남서해안의 여러 섬을 중심으로 생업에 종사하며 평화스럽게 살아간다.
*1485년(성종 20년) 11월, 명예욕이 강했던 전라도 도사 한건이 이들을 폭도로 몰아 강경진압을 결행하고 관아에 끌고가 매질하여 죽이는 사태가 발생하자 홍길동 집단은 생업을 뒤로한 채 재무장 투쟁에 나서게 된다.
*1487년(성종 22년) 홍길동 집단은 물론, 생계유지를 위해 어민들이 주로 이용하던 거도선(바닥이 평평하고 근거리 이동에 용이함)이용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린다.
*1489년(성종 24원년) 해상 통행증 발급 - 홍길동 집단을 색출하기 위해 바다를 왕래하는 사람을 상대로 통행증을 발급하여 활동을 원칙적으로 봉쇄함.
*1490년(성종 25년) 관군의 해상봉쇄작전으로 고립에 빠진 홍길동 집단은 2개조로 나누어 전라도 남해안 광양현(현재의 순천 광양만)으로 상륙을 단행한다. 그러나 또다시 관군에 쫓겨 지리산근처 임실 평당원에서 종적을 감춤.
*1495년(연산군 1년) 충청도 조령, 문경세재를 주요 활동지로 홍주와 공주를 생활근거지로 삼아 충청도 전역으로 세력을 넓힘. 특히 공주 무성산 정상(614m)에 요새를 쌓고 관군에 대항하며 집단생활을 영위하였으며, 이 시기에는 엄귀손 등 조정의 고위직 관리는 물론 지방의 수령, 아전, 유향소의 품관들까지 이들의 활동을 동조함.
*1500년(연산군 6년) 10월 22일 무오사화(1498년)로 인해 상당수의 사림파가 목숨을 잃거나 귀양을 가게되고 수년에 걸친 전국적인 가뭄으로 조정에 대한 백성들의 원성이 하늘을 찌르자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감옥에 갇힌 죄수들을 석방하여 가족과 함께 함경도지방에 가서 살도록 하는 대 사면령을 내림. 이로 인해 홍길동 집단도 자의반 타의반으로 체포되는 형식으로 자수하였는데, 강상죄(고위관직을 사칭하여 관리를 능욕한 죄)로 충청도에서 서울로 압송, 의금부에 갇힘.
*1500년(연산군 6년) 11월 남해 삼천리 유배형을 받음.
*1500년 12월 5일 하떼루마지마(파조간도) 정착
* 1501 ∼1503 : 이시가키지마(석원도) 오하마무라(대병촌) 후루수토지역에 집단거주지 조성하고 인근의 지배권을 장악(죽부도, 서표도, 여나국도…)
* 1504년 : 미야코지마(궁고도)의 추장인 나카소네의 혹독한 압제와 과중한 세금으로 고통에 시달리던 원주민을 규합하여 전쟁에서 승리하고 나카소네 집단을 섬의 동북부 밀림지역으로 몰아내고 상비옥산(上比屋山)에 조선 도래인들의 집단주거를 위해 초가집 군락을 조성.
* 1505 ∼ 1508년 : 구메지마에 상륙, 추장인 마다후쓰를 몰아내고 일본, 유구국, 중국을 상대로 중계무역을 하면서 동지나해의 해상권을 장악 섬의 요처에 적으로부터 방어하기에 유리한 조선양식의 성(城)을 구축.
* 1510년 : 한문본 홍길동전인 위도왕전에서 나이 70세에 사망
이중 임꺽정(林巨正)과 장길산(張吉山)은 실존여부가 확실하나, 홍길동(洪吉童)은 아직까지도 실존여부가 완전하게 입증안된 인물입니다.
실존했다고 알려진 홍길동은 허균의 소설속 주인공 홍길동과는 좀 다릅니다.
실존 홍길동은 세종22년(1440) 출생하여, 성종1년(1470) 까지 살았다고 전해지나, [홍길동전]의 홍길동은 연산군 시대에 활약하기 때문입니다.
임꺽정이 괴력의 소유자였다거나, 장길산이 무예의 달인였다는 사실에 비해, 홍길동이 도술과 축지법을 사용했다는 이야기는 신빙성에 의문을 제기하게끔 합니다.
임꺽정(?~1562)은 빅3 중 가장 존재여부가 확실한 인물 입니다.
양주의 백정 출신으로, 신분의 차별에 대한 불만으로, 명종14년(1559) 난을 일으킨 장본인이죠. 황해도 구월산을 거점으로 맹활약하였으며, 3년만인 1562년
토포사 남치근의 토벌군에 대패하고, 측근 서림의 배신으로 체포되어, 처형된, 순도100% 실존 인물입니다.
장길산(?~?)은 실존인물이긴 하나, 임꺽정처럼 자세한 기록은 부족한 편입니다.
끝내 잡히지 않았던 인물이라서 그런지, 행적에 대한 명백한 자료가 별로 없죠.. 광대 출신으로, 숙종13년(1687)부터 황해도 구월산을 거점으로 맹활약하게 됩니다.
임꺽정과 장길산이 거점으로 삼았던 황해도 은율군과 안악군의 경계에 위치한 구월산은 1950년 한국전쟁 당시, 공산군에 반대하면서 혁혁한 공을 세웠던 "구월산 유격대"가 활동하기도 한 매우 유명한 산입니다.
단군왕검이 은퇴한 아사달산이 바로 이곳 구월산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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