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여! 백 고무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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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산신씨가 반드시 알아야 할 7가지

나여! 백고무신 2015. 1. 22. 13:37

평산신씨가 반드시 알아야 할 7가지

1. 장절공의 출신지

고려사에는 춘천, 후에 발간한 신동국여지승람에는 곡성으로 되었음. 고려사는 정사이나 전체를 대략적으로 기술한 것이고 후자는 지역적으로 그 특성을 살펴 자세히 기록 전수한 것으로 보아 후자를 학계에서 통설로 인정함.

곡성에서 유년 및 청년시절을 보내면서 화장산 비래산 봉두산 일대를 중심으로 무예를 연마했으며 그 후 춘천에 거주했을 수도 있을 것임 (보통의 경우 시신은 고향 또는 거주지에 모시는 경우가 많음) 평산에 궁위전 300결과 성을 받음.

2. 유협 (한량)

유협(한량, 건달)인 능산을 궁예가 발탁했다는 설도 있으나 그것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고 말을 타고 맸다는 계마석도 있고 능산, 능길(아우)의 "능"자를 이름으로 사용한 것으로 보아 호족출신 임을 알 수 있음 (고려조에 '능'자 이름이 19명이었는데 모두 호족이고 백제의 수달장군도 '능창'이었음)

3. 견훤과 궁예

견훤은 단순히 후백제 건설을 표방했으나 궁예는 태봉국이라 하여 이상세계를 표방하였으므로 견훤을 따르지 않고 대의에 입각하여 궁예를 따름. 후에 폭정으로 백성을 도탄에 빠지게 하므로 궁예를 버리고 왕건 휘하로 들어감.

4. 위왕대사

927년 대구 팔공산 전투에서 위급한 왕건을 구하기 위하여 곤룡포를 대신 입고 지략을 다하여 용맹히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몸에 꽂히는 화살을 뽑고 또 뽑으면서 전쟁을 오래 끌어 왕건으로 하여금 탈출할 기회를 만들어 줌. 왕건은 근위병 몇 명만을 대동하고 한숨을 쉬며 장절공이 마련해준 시간을 이용하여 전지를 가까스로 빠져나와 후일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룸.

왕건이 휘하여 불과 몇 사람만을 데리고 도망치면서 한숨을 쉬었다는 '한숨바위'가 동수지역에 있음.

5. 위왕대사 평가

장절공의 위왕대사는 우리 역사에 처음 있는 유일한 일. 당시는 민주국가가 아니므로 왕을 통해서만 정치적 이상을 실현할 수 있음. 따라서 단순히 왕을 위해서 죽었다기 보다는 백성을 위해서 한 몸을 던짐. 후백제 건성을 표방한 견훤이나 후에 포악한 궁예를 버린 것도 백성을 위한다는 정신에서 이루어짐.

고려 건국의 일등공신(3000명이나 되는 공신가운데 일등공신은 4명, 4명은=신숭겸, 유금필, 배현경, 복지겸)이었음에도 벼슬을 마군장군 이상 나아가지 않았고 그 흔한 왕건과의 혼인도 없었음.

6. 팔관회와 도이장가

신숭겸은 고려조부터 조선후기까지 가장 본보기가 되는 충신으로 고려 예종 때 팔관회(전몰장병 위령제)에서 신숭겸장군의 가상을 만들어 춤을 즐김=도이장가와 이두로 된 노래도 전해 옴)

조선조에서도 파주에 숭의전을 지어 왕건 다음으로 신숭겸, 서희, 강감찬, 김취려, 정몽주 순으로 모심.

7. 왕건릉과 장절공

북한은 광개토대왕과 왕건 연구가 활발하며 왕건릉에 무인으로 신숭겸, 유금필, 배현경, 대광현(귀화인) 순으로 모시고 오른편에는 문인을 모심.  

 

                                                                              유금필

 

개성 현릉(왕건릉)은, 서기 943년(태조 26) 5월에 조성. 첫째 왕후인 신혜왕후 유씨가 함께 묻혀 있다. 현릉은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몇 차례 이장된 적이 있었다. 1018년(현종 9) 거란이 침입하자 부아산 향림사로 옮겼다가 다음 해 11월 다시 환장하였으며, 1217년(고종 4) 거란족이 침입하자 태조의 재궁(관)은 다시 봉은사로 옮겨졌다. 또 1232년(고종 19) 강화도로 천도하면서 현릉은 다시 강화로 이장되었으며, 개경으로 서울을 옮긴 1270년(원종 11)에 임시로 이판동에 옮겼다가 1276년(충렬왕 2) 제자리를 찾게 되었다. 따라서 지금의 현릉 자리가 처음 태조가 묻혔던 바로 그 자리인지는 알 수 없다. 이곳은 또한 1906년(광무 10) 도적들에 의해 파헤쳐진 적이 있었으며, 1950년 한국전쟁 중에 파괴되었으나 1954년 복구한 적이 있다. 1992년 북한에서 발굴조사 후 새로 고치고, 1993년 5월 5일 한자로 쓴 "고려태조왕건왕릉개건비"를 세웠다. 이때 12지신상을 새긴 본래의 병풍석들은 무덤 안쪽에 넣어 보존하고 있다. 북한에서 발굴할 때 여러 가지 유물이 나왔는데, 그중 금동불상은 등신불로서 현재 개성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무덤안칸에는 벽화를 그렸는데, 동벽에 매화나무, 참대, 청룡이, 서벽에 소나무, 매화나무, 백호가, 북벽에 현무, 천장에는 8개의 별이 그려져 있다.

 

 

개성 : 왕건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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