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여! 백 고무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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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 이모저모/평산신씨 역사 ~~

☞.신유장군 유적지 (2015.02.21)

나여! 백고무신 2015. 2. 23. 07:43

평산신씨 세거지

곤산서원 (崑山書院)

주 소 : 경북 칠곡군 약목면 복성리 1134

연 혁

1773년(영조 49)에 묘우로 건립된 뒤 1783년(정조 7)에 신우덕(申祐德 1581~1663), 신익황(申益愰 1672~1722)을 봉안하고 서원으로 승격되어 강학을 한 곳이다.  그러나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어 빈터로 남아 있다가 최근 2004년 이 터에 다시 곤산서원이 복원되었다.

배향인물

1).신우덕(申祐德, 1581~1663)

자는 여가(汝嘉), 호는 진정(眞靜), 본관은 평산, 판서 효창의 후손이며, 증공조참의 계의 아들이다.

항시 자손에게 이르기를 충효근검 4자를 정령한 훈계를 하였으니 그 때문에 대대로 충효하고 청백함이 현저하였다. 가선대부 호조참판에 증직되고, 약목의 곤산서원에 제향하였다. 칠곡군 북삼면 숭오리의 강진에 유허비가 소재하니 성산인 이기윤이 비문을 지었다.

2)신익황(申益愰, 1672~1722)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명중(明仲), 호는 극재(克齋). 아버지는 수사 명전(命全)이며 그의 조상은 원래 개성에서 살다가 중간에 서울로 옮기고, 5대조 때 경상북도 인동으로 옮겼다. 일찍이 박번(朴蕃)에게 글을 배워 진작 학문의 성취를 보았고, 21세에 향시에 합격한 뒤에는 과거를 단념하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그의 학문은 이현일(李玄逸)에게서 크게 영향을 받았다. 27세 되던 해 5월에 이현일을 광양의 배소로 찾아본 것을 시초로, 여러 차례 면대하여 가르침을 받기도 하고, 전후 열 차례의 서면 질의를 통한 학문적인 문의가 있었다.

이들 질문과 토의 내용은 유학 전반에 걸쳐 광범하게 행해졌다. 특히 문제 삼은 것은 당시 학계의 주요 관심사였던 이(理)와 기(氣), 사단(四端)과 칠정(七情),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의 문제였다. 이현일을 만나기 이전의 그는 이황(李滉)의 설보다는 이이(李珥)의 설에 기울어져 있었다.

즉, 이와 기를 분개(分開)하기보다는 혼륜(渾淪)한 입장에서 보았다. 사단과 칠정은 근원적으로 다른 것이 아니라, 사단은 칠정의 선한 부분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이·기의 발동(發動)에 있어서도 이황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이 아니라, 기발일도설(氣發一途說)에 찬성하는 처지였다.

그러나 이현일과의 학문적 교섭을 통해 점차 이황·이이의 사상을 동등한 차원에서 인정하려는 과정을 거치게 되고, 거기에서 더욱 철저한 논의를 거쳐 마침내 확연히 이이를 버리고 이황의 견지를 찬성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이를 한갓 무정의(無情意)·무조작(無造作)의 추상적인 사물(死物)이 아니라, 은연 중에 능동(能動)·능발(能發)을 간직한 것이라 하고, 이와 기를 확연히 둘로 갈라서 보았다.

이와 기가 한 물건(理氣爲一物)이라고 보는 이이의 주장에 반대, “이와 기를 구별하지 않고 한 물건이라고 하면, 마침내 욕(欲)을 이라 하고 기를 성(性)이라고 인정하게 된다.”고 하고, “이와 기를 확연히 나누고 이가 선한 것임을 알 때 비로소 윤리가 성립된다”고 주장하였다.

사단칠정설에 있어서도 사단이 칠정의 일부분, 즉 칠정이 발하여 절도에 맞게 된 것〔中節〕이라는 주기설(主氣說)을 반대하고, 사단과 칠정은 근본적으로 다른 것으로서 사단은 도심이고, 칠정은 인심이라고 하였다.

그가 학문적으로 교유한 사람으로는 권두인(權斗寅)·권두경(權斗經)·이재(李栽)·정사신(丁思愼)·권중도(權重道) 등 당시 영남의 대표적인 유학자들이었다. 그가 죽은 뒤 43년이 지난 1765년(영조 41)에 아들 염(琰)으로 인해 사헌부 대사헌에 추증되었고, 1784년(정조 8)에 사림들이 모여 그의 위패를 곤산서원(崑山書院)에 봉안하였다.

편저에는 ≪극재집≫·≪운곡도산휘음 雲谷陶山徽音≫·≪경재집해 敬齋集解≫·≪이기성정통간도 理氣性情通看圖≫·≪동국승경와유록 東國勝景臥遊錄≫ 등이 있다.

건축물

경도사(景道祠)와 영모재(永慕齋) 그리고 외삼문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경도사에는 곤산서원에 배향된 신우덕(申祐德), 신익황(申益愰) 두 분의 신주를 모시고 영모재에는 진정공 신우덕의 후손 다수의 신주를 봉안하여 강당보다는 재실의 기능을 하고 있다. 2003~2004년에 평산신씨 문중에서 복원하였다. 사당 앞에 비석 1기가 있다.

 

평산신씨 세거지 곤산서원 前에서

 

 

 

 

 

곤산서원 현판

 

 

 

 

 

 

 

 

 

 

신유장군 유적지 [申劉 將軍 遺蹟地]답사

위치 : 경상북도 칠곡군 약목면 남계리

1982년 8월 4일에 경상북도 기념물 제38호로 지정된 유적지

1685년(효종 9) 2차 나선정벌군을 이끌고 흑룡강 부근에서 러시아군을 물리친 공적을 기림.

약목면 소재지에서 두만지로 가다보면 두만지 200~300m 못 미쳐 길 오른쪽에 있다.

개요 : 1982년 8월에 경상북도 기념물 제38호로 지정된 곳으로 조선 효종 때 무신인 신유[1619~1680]장군을 모신 사당이다. 신유 장군은 약목면 복성리 출신으로 1658년(효종 9) 청국의 원병 요청으로 당시 함경북도의 병마우후로서 제2차 나선정벌의 영장으로 북병영의 정예 포수 2백여 명을 주축으로, 총병력 265명을 이끌고 만주의 헤이룽강까지 출병하여 우수한 전투 능력을 발휘하여 남하하는 러시아의 스테파노프 부대를 격파함으로써 빛나는 전공을 세웠다.

1680년(숙종 6)에 장군이 62세로 생을 마감하자 왕이 제문을 내리고 예관을 보내 제사하게 하였다. 그 후 약목면 남계리 숭무사에 제향하고 경내에 신도비를 세웠는데 판서 이현일이 비문을 짓고, 글씨는 교리 이동적이 전액하고 이재익이 음기를 썼으나 6·25전쟁 때 포격으로 파손되었다. 그 후 고쳐 세운 비석의 글씨는 이상건이 썼다. 묘소는 숭무사 뒷산인 봉명산 중턱에 있으며 매년 음력 정월 15일에 향사(享祀)하고, 3월에는 후손들이 추모제를 올리고 있다. 장군의 유물로는 교지 35장, 논서 6장, 교서 1장, 사제문 1장, 부인교지 1장, 분재기 1통, 간찰 1통이 있다. 사당과 경역은 1979~1981년에 보수·정화하였다.

신유 장군의 사당을 중심으로 신도비각, 내·외삼문 등으로 이루어진 유적지이다. 외삼문인 북정문(北征門)을 지나 경내로 들어가면 신도비각과 존성재 건물이 나오고 내삼문인 선위문(宣威門)을 지나면 신유 장군의 영정과 위패가 봉안된 사당인 숭무사(崇武祠)가 있다.

신유장군과 2차 나선정벌

나선정벌[羅禪征伐]

조선 효종 때 연해주 흑룡강 방면으로 남하하는 러시아 세력을 조선군사(총수병)가 청나라 군사와 함께 정벌한 일.

나선(羅禪)은 러시아(Russia)를 지칭한다. 1651년(효종 2) 러시아인들은 풍부한 자원을 보유하고 있는 흑룡강(黑龍江) 일대에 진출하여 성을 쌓고 곡물과 광물자원 등을 획득하기 위한 경제활동을 전개하면서 청나라와 충돌하게 되었다. 러시아인들은 그 활동 범위를 점차 넓혀 우수리강 하구를 지나 송화강(松花江) 방면으로 내려왔고, 이에 대항하여 청나라는 군사를 동원하여 격퇴하려 하였다. 그러나 청나라 군이 총포로 무장한 러시아인들에게 계속 연패하였고, 1653년 러시아는 이 지역의 경략을 국가 목표로 삼았다.

청은 남하하는 러시아 세력을 격퇴하려 하였으나 무기 수준에서 낙후되어 불가능함을 알고, 임진왜란 이후 조총을 사용하는 조선에 총수병을 요청하였다(1654, 효종 5). 조선에서는 함경도 병마우후 변급(邊岌)에게 조총군 100명과 초관(哨官) 50여 명을 주어 지원군으로 파견하였다. 이들은 모란강(무단장 牧丹江) 상류지역의 영고탑(寧古塔/寧安)에 이르러 명안달리(明安達哩)가 이끄는 청군 3천여 명과 합세하여 북상하다가 혼동강(混同江, 송화강 중류 지점)상에서 러시아군을 만나 교전하였다(4월 28일). 결과 7일만에 적군을 패퇴시키고 조선군은 6월에 본국 개선하였다. 청은 조선 총수의 위력을 처음 경험하였다. 이것이 제1차 나선정벌이다.

그 후에도 청나라는 단독으로 러시아군 거점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하고, 다시 조선에 총수(銃手)의 파견을 요청하였다(1658, 효종 9). 조선은 혜산 첨사 신유(申瀏)에게 총군 200명과 초관 60여명을 주어 다시 파견하였다. 신유는 영고탑에서 사이호달(沙爾瑚達)이 이끄는 청나라 군대와 합류하여 북상하였고, 흑룡강과 송화강이 만나는 지점에서 '스테파노프'의 러시아 군사와 접전을 벌였다(6월 10일). 10여 척의 배를 앞세우고 공격해 오는 러시아군에 총과 화전(火箭)으로 맞서 싸워 대승을 거두었다. 이 전투에서 스테파노프를 포함하여 270여 명이 전사하였고 잔당 모두 패퇴 전멸하였다. 이것이 제2차 나선정벌이다.

변급장군과 1차 나선정벌

변급[邊岌]

조선 중기의 무신. 나선정벌에 출전하여 러시아군을 크게 격파하였다. 전라도 수군절도사, 충홍도 수군절도사를 지냈다.

생몰연대 : 미상

국적 : 조선

활동분야 : 군사

주요업적 : 1차 나선(러시아)정벌

시대 : 조선시대(인조, 효종)

변급의 출생과 집안 내력에 관해 알려진 바가 없다. 1654년(효종 5) 함경도 병마우후(咸鏡道兵馬虞候)로 근무하였는데 당시 청나라는 흑룡강을 따라 남하하는 러시아군을 막기 위해 조선의 원병을 요청하였다. 조선에서는 변급을 영장(領將)으로 임명하여 청나라 군사를 도와 나선정벌(羅禪征伐)에 출전하게 하였으며, 변급은 조총군(鳥銃軍) 150여 명을 거느리고 두만강을 건너갔다. 중국 헤이룽장성 영고탑(寧古塔:寧安)에서 청군과 합류하여 후통강(厚通江:混同江)에 이르렀을 때 러시아군을 맞아 총격전을 벌였다. 조청연합군은 러시아군에 비해 화기의 성능이 약해 고전을 했으며 배를 버리고 강변에 진지를 구축하고 총격전을 벌였다. 러시아군이 상륙하여 공격해오자 집중사격으로 큰 피해를 입혔다. 러시아군은 흑룡강 상류를 따라 철군하였으며 변급은 강변에 토성을 쌓아 방비케 하고 돌아왔으며 조선군은 단 1명의 전사자도 발생하지 않았다. 1차 나선정벌의 공로를 인정받았고 1656년 전라도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가 되고, 현종이 즉위하자 충홍도(忠洪道) 수군절도사에 전임되었다.

 

 

신유장군 유적지에 뜬금 없이 가수 신유 비 라, 흠,  뜻은 좋지만 약간은 오바 한 듯

유적지 표지석보다 가수 노래비가 더 커.ㅋㅋ

 

 

 

 

 

 

 

선봉사 대각국사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