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여! 백 고무신
[스크랩] 족보 상식 백과 본문
族譜 常識
추석을 앞두고 알아두시면 좋을 듯하여 올립니다, 아래의 알고 싶은 내용을 클릭하면 내용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族 譜
일족(一族)의 계보(系譜)를 기록한 가계보(家系譜). 중국 후한(後漢)시대에 왕실의 계보를 기록한 것이 그 시초이다. 한국에서도 고려시대부터 편찬되었다고 하는데,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족보로서는 1476년에 발간된 안동권씨(安東權氏)의 성화보(成化譜)가 있다. 한국에서 족보의 발생은 벌족(閥族)의 세력이 서로 대치하고, 동성일족(同姓一族)의 관념도 매우 뚜렷하게 된 이후의 일이며, 족보 간행을 촉진시킨 요인은
① 동성불혼(同姓不婚)과 계급내혼제(階級內婚制)의 강화
② 소목질서(昭穆秩序) 및 존비구별(尊卑區別)의 명확화
③ 적서(嫡庶)의 구분
④ 친소(親疏)의 구분
⑤ 당파별(黨派別)의 명확화 등이었다.
족보에는 편찬할 때의 서문(序文)과 선조(先祖),현조(顯祖)의 사적(事蹟) 행장기(行狀記) 묘비문(墓碑文), 현조의 묘(墓)나 조묘(祖墓)의 소재도(所在圖)등이 기재되며, 또 시조(始祖)부터 현세대에 이르는 일족 전체의 남성성원(男性成員)의 이름,자,호,시호(諡號),관직 생몰연월일 및 묘의 소재지, 배우자의 성과 본관 등이 기재된다. 다만 여자의 이름은 기록되지 않으며, 남편의 성명,본관 그리고 아들의 이름이 기록될 뿐, 철저한 남계중심의 기록이다. 족보는 현대에 와서는 누구든지 만들어도 되지만, 봉건사회에서는 양반씨족이 아니면 가질 수가 없었는데, 말하자면 양반이라는 증서와 같은 것이었으며, 이것이 없으면 상민(常民)으로 전락하여 병역 등이 부과되므로, 조선시대 중기 이후 족보 편찬사업이 활발해졌다. 족보에는 시조부터 현세대에 이르기까지의 일족을 망라한 대동보(大同譜)와 유력한 인물을 파조(派祖)로 하는 일파를 단위로 해서 편찬되는 파보(派譜)가 있다. 대동보의 편찬은 규모가 크기 때문에 대씨족(大氏族)인 경우 거의 불가능하고, 따라서 30∼40년마다 편찬되는 파보가 주가 되지만, 이 시조까지의 계보와 각 파간의 계통이 분명히 드러나야 한다. 족보는 한 성씨의 역사 기록이고 가계의 연속성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에, 기본적으로는 사문서(私文書)이지만 공문서의 성격도 지닌다. 족보의 기록을 통하여 자기 조상의 업적을 찾아보고 종중(宗中)의 협동과 상부상조, 그리고 교화의 역할을 한다는 면에서는 사회통합적 기능도 아울러 지닌다고 볼 수 있다. 족보가 단순히 가계의 기록만이 아니라 종중(宗中)의 단합과 사회적 통합의 기능을 지닌다고 할 때 그것은 오늘날에도 존재의의가 있을 것임에 틀림없다. 최근에는 족보 안에 사진을 넣거나 한글로 풀어쓰거나 영상자료 형태로 제작하는 등 여러 새로운 양식들이 시도되고 있다.
본관(本貫)이란?
시조(始祖)의 출신지. 관향(貫鄕),관적(貫籍),씨관(氏貫),선향(先鄕)이라고도 한다. 한국에서는 성(姓)의 종류가 적어 성을 가지고 동족을 구별할 수 없었기 때문에 조상의 출신지에 성을 붙여서 동족임을 표시하였다. 성씨와 본관제도는 계급적 우월성과 신분을 나타냈으므로 왕실,귀족,일반지배계급,양민,천민의 순으로 정착되었다. 중국은 황제(黃帝) 이래 역대의 제왕이 봉후(封侯) 건국할 때, 출생과 동시에 성을 주고 채지(采地)를 봉해 씨(氏)를 명명해 준 데서 성씨는 계속 분화되었다. 진(秦),한(漢)나라 이후 위(魏)나라 때 9품중정법(九品中正法)의 실시로 문벌귀족사회가 확립됨에 따라 성의 지벌(地閥)을 나타내는 군망(郡望)이 형성되어 갔고, 수(隋)·당(唐)나라 시대에는 군성(郡姓),주성(州姓)이 있었다. 고려초에 확립된 한국의 성씨와 본관제도는 당나라때의 제도를 따랐을 것으로 짐작되며, 고려 초부터 조선시대까지는 백정이나 노예를 제외하고 양·천민 구별 없이 모두 본관을 가지고 있었다. 15세기 초에 《세종실록》 <지리지>의 성씨조항에 기록된 성의 수는 약 250여 개, 본관수는 1500여 개가 되었다. 그리고 성이 없었던 백정과 노비에게 신분을 표시하는 의미에서 본관이 생겼는데, 그것은 신라 이후 군현제와 깊은 관련이 있다. 군·현 이상의 고을에 사는 주민은 양민, 그 이하의 향(鄕),소(所),부곡(部曲),처(處),역(驛),섬 등의 주민은 천민으로 규정하여 거주와 신분이 결합되어 있었는데, 그 거주지가 본관의 기원이 되어 신분을 표시하게 되었다. 당시 성이 없는 사람도 본관은 있었던 기록을 보면 그것이 혈연적 집단의 신분을 표시하였음을 알 수 있다. 본관은 구역에 따라 격차가 있었고 신분과 직역(職役)에 따라 본관이 갖는 의미가 달랐다. 그와 같이 국민을 지역별,계층별로 편성함으로써 신분질서를 유지하고 징세조역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다.
보첩(譜諜)이란?
1. 보첩(譜牒)의 의의(意義)
보첩이란 한 종족(種族)의 계통을 부계(父系)중심으로 알기 쉽게 체계적으로 나타낸 책으로, 동일혈족(同一血族)의 원류를 밝히고 그 혈통을 존중하며 가통(家統)의 계승을 명예로 삼는 한 집안의 역사책이다.
2. 보첩의 기원(起原)
보첩은 원래 중국의 6조(六朝)시대부터 시작되었는데 이는 제왕연표(帝王年表:왕실의 계통)를 기술한 것이었으며, 개인적으로 보첩을 갖게 된 것은 한(漢)나라 때 관직등용을 위한 현량과(賢良科)제도를 설치하여 응시생의 내력과 그 선대(先代)의 업적등을 기록한 것이 시초가 된다.
특히 북송(北宋)의 대문장가인 3소-소순(蘇洵).소식(蘇軾).소철(蘇轍)에 의해서 편찬된 족보는 그 후 모든 족보편찬의 표본이 되어왔다.
우리나라에는 고려 왕실의 계통을 기록한 것으로 의종(毅宗)때 김관의(金寬毅)가 지은[王代宗錄 (왕대종록)]이 그 효시(曉矢)라 할 수 있다.
또한 사대부의 집에서는 가승(家乘)이 전해 내려왔는데, 체계적으로 족보의 형태를 갖춘 것은 조선 성종7년(성종7:1476)에 발간된 안동권씨 성화보이고, 지금과 혈족(血族) 전부를 망라한 족보는 조선 명종(明宗)때 편찬된 문화유씨보(文化柳氏譜)로 알려졌으며 지금까지 전해온다.
3. 보첩의 종류(譜牒의 鍾類)
가.대동보(大同譜)
같은 시조(始祖) 밑의 중시조(中시祖)마다 각각 다른 본관을 가지고 있는 씨족간에 종합 편찬된 족보이다.
즉 본관은 각기 다르되, 시조가 같은 여러 종족이 함께 통합해서 만든 보책이다.
나.족보(族譜)
관향(貫鄕)을 단위로 같은 씨족의 세계(世系)를 수록한 보첩으로, 한 가문의 역사를 표시하고 가계(家系)의 연속을 나타내는 보책(譜冊)이다.
다. 세보(世譜)와 세지(世誌)
한 종파(宗派) 이상이 동보(同譜).합보(合譜)로 편찬되었거나, 어는 한 파속(派屬)만이 수록되었을 경우이며, 이를 세지(世誌)라고도 한다.
라. 파보(派譜)
시조로부터 시작하여 어느 한 파속(파속)만의 명.휘자(名.諱字:이름자)와 사적(事蹟)을 수록한 보책이다.
마. 가승보(家乘譜)
본인을 중심으로 편찬하되, 시조로부터 시작하여 자기의 직계존속(尊屬:자기의 윗대)과 비속(卑屬:자기의 아랫대)에 이르기까지 이름자와 사적(事蹟)을 기록한 것으로 보첩편찬의 기본이 되는 문헌이다.
바. 계보(系譜)
한 가문의 혈통관계를 표시하기 위하여 이름자만을 계통적으로 나타내는 도표(圖表)로서, 한 씨족 전체가 수록되었거나 어느 한 부분이 수록된 것이다.
사. 가보(家譜)와 가첩(家牒)
편찬된 형태나 내용의 표현이 아니라 집안에 소장되어 있는 모든 보첩을 말한다.
아. 만성보(萬姓譜)
만성대동보(萬姓大同譜)라고도 하며, 모든 성씨의 족보에서 큰 줄기를 추려 내어 집성(集成)한 책으로 족보의 사전(辭典) 구실을 하는 것이다.
4. 보첩의 간행과정(譜牒의 刊行과程)
족보를 간행하고자 계획을 세우면 먼저 종친회(宗親會)를 조직하여 족보편찬위원회(族譜編纂委員會)를 구성하여 종친들의 분포사항을 파악하고, 이를 널리 알려 일가(一家)의 호응을 받아야 한다.
편찬위원회의 구성이 끝나면 편집에 관한 모든 사항을 논의 결정하여 지방조직을 통해 통해 수단(수단:명단을 받음)을 하고, 원고를 정리하여 출판사에 의뢰를 하여 간행하게 된다.
5. 보첩(譜牒)을 보는 방법(方法)
족보를 보면 서문(序文)이 나오는데, 이는 머릿말로 자랑스러운 가문과 조상의 숭고한 정신을 고취시키고 족보 간행의 중요성및 긴요성을 강조하는 것이며,보통oo보(譜)라 하여 족보간행연도를 앞에 붙여 족보의 명칭으로 삼는다.
본문에는 시조(始祖)와 비조(鼻祖)로부터 시작하여 1간을 같은 대(代)로 하여 보통 6간으로 되어 있는데, 처음에 이름자가 나오고 이엇 출생(生)과 사망(卒)연도가 표시된다.
20세 이전에 사망하면 요절(夭折)이란 뜻의 조요(早夭)라 표시하고 70세가 넘어 사망하면 수(壽)라 하고 방서란(蒡書欄)에 기록한다.
시호(諡號)와 관직(官職)이 기록되고 비필(妃匹)이라 하여 배우자를 표시하는데 보통 배(配)자 만을 기록하며, 본관과 아버지의 이름자와 관직이 기록된다.
또한 묘소(墓所)가 기록되는데 소재지와 방위(方位) 그리고 석물(石物) 등을 표시하며, 합장(合葬) 여부 등도 기록하는 것이 보통이다.
혹간 출후(出后) 출계(出繼)라 하는 것은 다른 집으로 양자(養子)로 간 경우이고, 양자로 들어온 사람은 계자(系子) 또는 계자(系子)라 기록되며, 서얼(庶孼)로 입적(入嫡)되었을 경우에는 승적(承嫡)이라고 표시한다.
가. 보첩의 형태(譜牒의 形態)
각 족보마다 그 형태를 달리하고 있어 정설(定說)을 네세우기는 어려우나, 대략 행용줄보라 일컫는 종보(縱譜)와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횡간보(橫間譜)가 있다. 이 횡간보 방식은 5대 1첩(疊)으로 하는 일반적인 방법으로, 지면은 6간식으로 꾸미는 것이 대부분이다. 요즘 들어 7-8간 이상으로 꾸미거나 그 이상으로 하는 방식도 있다.
그러나 인구가 늘어남에 따라 보기에 불편한 점이 많아, 현대감각에 맞는 새로운 방법이 필요시 되고 있다.
나. 보첩의 제반상식(용어해설)
(1) 시조(始祖).비조(鼻祖).중시조(中始祖)
시조(始祖)란 제일 처음의 시조(始祖)로서 첫번째 조상이며, 비조(鼻祖)란 시조 이전의 선계조상(先系祖上) 중 가장 높은 사람을 일컫는다.
중시조(中始祖)란 시조 이하에 쇠퇴한 가문을 일으켜 세운 조상을, 모든 종중(宗中)의 공론(公論)에 따라 정하여 추존(追尊)한 사람이다.
(2) 선계(先系)와 세계(世系)
선계(先系)란 시조이전 또는 중시조 이전의 조상을 일컫는 말이며, 세계(世系)란 대대로 이어가는 계통의 차례를 말한다.
(3) 세(世)와 대(代)
시조를 1세(世)로 하여 아래로 내려 갈 경우네는 세(世)라 하고, 자신을 빼고 아버지를 1대(代)로 하여 올라가며 계산하는 것을 대(代)라 한다.
또한 자기의 조상을 몇대조 할아버지라고 하고, 자신은 시조 또는 어느 조상으로부터 몇세손(世孫)이라고 한다.
(예 : 고조할아버지는 나의 4대조 할아버지가 되고, 나는 고조할아버지의 5대손이 되는 것이다.)
(3) 이름자
요사이는 이름을 하나로 부르지만 옛날에는 여러가지로 불렀는데, 어렸을 때 부르는 이름을 아명(兒名) 이고 우리가 익히 아는 자(자)는 20세가 되면 요즘의 성년식과 같은 관례(冠禮)를 행하는데 여기에는 식을 주례하는 주례자가 있어, 예식을 서행함과 함께 지어준 것이다. 또한 가문의 항렬자(行列字)에 따라 족보에 오르는 항명(行名)과 특별히 따로 부르는 별호(別號)가 있다. 우리는 보통 웃어른들의 이름자를 말할 때 결례(缺禮)를 하는 경우가 많은데, 살아 계신 분에 대하여는 함자(銜字)라 하고 돌아가신 분에 대하여는 휘자(諱字)라고 하며, 여기에는 이름자 사이에 자(字)를 넣어서 부르거나 글자 뜻을 풀어서 말하는 것이 예의이다.
(예 : 성수(成洙); 성(成)자, 수(洙)자 또는 이룰성(成)에 물수(洙)자를 쓰십니다.)
(5) 항렬(行列)과 항렬자(行列字)
항렬이란 같은 혈족사이에 세계(세계)의 위치를 분명히 하기 위한 문중율법(門中律法)이며, 항렬자란 이름자 중에 한 글자를 공통적으로 사용하여 같은 혈족.같은세대임을 나타내는 것으로 돌림자라고도 한다.
선조들은 자손들의 항렬자와 배합법(配合法)까지를 미리 정해놓아 후손들이 그것을 따르도록 관례로 만들어 놓았다.
항렬은 가문과, 파(派)마다 각기 다르나 그것은 대략
1. 십간(十干)순으로 쓰는 경우
갑(甲).을(乙).병(丙).정(丁).무(戊).기(己).경(庚).신(辛).임(壬).계(癸)를 순서적으로 쓴다.
2. 십이지(十二支)순으로 쓰는 경우
자(子).축(丑).인(寅).묘(卯).진(辰).사(巳).오(午).미(未).신(申).유(酉).술(戌).해(亥)를 순서적으로 쓴다.
3, 숫자를 포함시키는 경우
일(一 : 丙.?).이(二:宗.重).삼(三.泰).사(?.?)등으로 쓰는 경우
4. 오행상생법(五行相生法)으로 쓰는 경우
금(金).수(水).목(木).화(火).토(土)의 변을 사용하여 순서적으로 쓰는 경우인데, 이를 가장 많이 사용한다.
항렬은 장손(長孫)계통일수록 낮고 지손(支孫)계통일수록 높아서, 자기보다 나이가 적어도 할버지뻘이 되는 경우가 있어 존대어를 쓰는 경우가 허다하다.
우리는 흔히 자기와 성(姓)이 같은 사람을 만났을 때, 먼저 본관을 물어보고 같은 본이면 서로 항렬을 비교하여 촌수(寸數)를 따져 쉽게 친숙해질 수 있다.
(6) 사손(嗣孫)과 사손(祀孫)
사손(嗣孫)이란 한 집안의 종사(宗嗣), 즉 계대(系代)를 잇는 자손을 말하며, 사손(祀孫)이란 봉사손(奉祀孫)의 준말로, 조상의 제사를 받는 자손을 말하는 것이다.
(7) 후사(後嗣)와 양자(養子)
후사(後嗣)란 뒤를 잇는다는 뜻으로, 계대(系代)를 잇는 자손을 말한다. 만약 계대를 이을 후사가 없을 경우에는 [무후(无后)].양자(養子)로 출계(出系)하였을 때는 [출후(出后)], 서얼(庶孼 : 첩의 자손)로서 입적(入嫡 : 적자로 들어옴)되었을 경우에는 승적(承嫡 : 서자가 적자로 됨), 그리고 후사가 확실치 않아 확인할 수 없을 때에는 [후부전(后不傳)]등으로 그 사유를 보첩의 이름자 밑에 작은 글짜로 표시한다.
옛날에는 양자로 계대를 승계하려면 예조(禮曹)에 청원을 하여야 하는데, 자손은 하늘이 점지하는 것이라 하여 예조에서 입안(入案)한 문서를 동지사(冬至使)가 중국 황제에게 가져가면, 황제가 하늘에 고유(告由)한 다음 예조에서 허가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큰 아들은 양자로 출계할 수가 없도록 하였는데, 종종 관(官)의 허가를 받지 않고 출계하기도 하였다.
6. 보첩의 현황(譜牒의 現況)
가. 우리나라의 족보현황
우리나라의 족보는 세계에서 부러워 할 정도로 가장 발달된 족보로 정평이 나 있으며, 보학의 종주국으로 꼽힌다. 따라서 우리나라보다 외국에서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연구하는 실정이다. 현재 국립도서관의 계보학 자료실에는 600여종에 13,000여권이 소장되어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열람하고 있다.
그런데 한글세대가 자라나면서 한문으로 된 족보가 읽혀지기 어렵게 되자, 각 가문에서는 족보의 한글화 작업을 서두르고 있으며, 아울러 간지(干支)를 서기(서기)로 환산하거나 사진의 컬러화와 체재의 단순화 작업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또한 여러 뜻있는 학자들이 학회(학회)를 결성하여 외국과의 교류를 통해 체계적인 학문으로 발전시키고 있으며, 한글세대에 맞는 현대감감으로 족보를 개편하여 모든 이들이 실용적으로 열람할 수 있도록 활발한 연구를 하고 있다.
나. 외국의 족보현황
족보는 한국이나 동양의 일부국가에만 있는 것으로 아는 이가 많은데, 사실은 세계 거의 모든 나라에 족보제도가 있다. 많은 나라들에 족보학회(族譜學會)가 있으며,족보만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도서관이 있는 나라도 있다.
미국의 족보전문 도서관에는 마이크로 필름화가 되어 있으며 족보학회가 창립된 지도 80년이 넘어, 많은 학자들이 국제회의를 통하여 족보에 대한 여러가지 세미나를 하고 있다.
특히 하버드 대학에서는 한국의 족보제도를 연구하기 위하여 한국의 족보들을 모두 필름으로 촬영하여 보관하고 있다.
미국의 유타주의 각 대학에서는 계보의 작성법을 학과에 편성해놓고, 교과로 배우고 있으며 연구발표회도 활발히 진행중이다.
이외에도 일본의 동경대학과 경도대학, 중국의 남경도서관과 중국과학원.북경도서관. 프랑스의 극동학원.베트남의 국립도서관 등에 동양의 족보가 보존되어 있다.
명칭에 있어서, 중국에서는 종보(宗譜)라 하며, 상류계층에만 족보가 보급되어 있는 일본에서는 가보(家譜)라는 이름을 많이 쓰고, 서구에서는 [가족의 나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또한 지금까지 족보가 없는 민족 가운데는 잃어버린 조상을 찾으려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으며, 유럽의 민족주의 국가에서는 지난날의 잡혼(雜婚)에 의한 질(質)의 저하를 막기 위해 혈통을 존중하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이와같이 오늘날에 있어서 족보는 세계 각국 널리 보급되어 있을 뿐 아니라, 매우 큰 관심을 갖고 연구하고 있는 실정이다.
사당(祠堂)
조상의 신주(神主)를 모시는 곳으로 가묘(家廟)라고도 한다.
고려말옆 정몽주.조준등이 시행을 역설하였으나 불교가 성행하던 때라 실천하지 못하다가, 주자학(朱子學)을 정교의 근본으로 삼은 조선시대에 들오와 시행되었으며, 그 근원은 주자가례(朱子家禮)에 의한 것이다.
조선초기에는 일부 사대부에서만 시행하다가, 선조(先祖) 이후부터 일반화되고 서인(庶人)들도 사당을 갖기 시작했다.
사당에는 3년상을 마친 신주(神主)를 모시는데, 옛날에는 집을 지으려면 반드시 사당을 먼저 세워야 한다. 그 위치는 정침(正寢) 동편에 3간으로 세워 앞에 문을 내고, 문 밖에는 섬돌 둘을 만들어 동쪽을 조계, 서쪽을 서계(西階)라 하여 모두 3계단으로 하였다.
사당안에는 4감(龕 : 신주를 모셔놓은 장)을 설치하여 4대조(代祖)를 봉안하며, 감 밖에는 장(帳)을 드리우며 각 위패(位牌)마다 제상(祭床)을 놓고 그 위에 촛대 한쌍씩을 놓으며 최존위(最尊位)는 향상(香床)을 놓는다.
호당(湖堂)
조선 세종때, 장래가 촉망되는 젊고 재주있는 문신들에게 국가에서 장소를 제공하여 수양(修養)과 학문연구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하던 곳으로, 독서당(讀書堂)이라고도 한다.
1446년(세종 28)에 집현전학자인 부교리(副교리 : 정5품) 권채.저작(著作 : 정8품) 신석견. 정자(正字 : 정9품) 남수문등을 세종이 친히 불러 [너희들은 비록 어린 나이지만 장래가 매우 촉망된다.
지금부터 벼슬을 그만두고 각자 집에서 편안히 독서에 전념하여 장래를 기약하도록 하라]고 분부하고 사가(賜暇 : 휴가를 줌)를 내렸다.
이를 기초로 하여, 당시 대제학(大提學)이었던 변계량(卞季良)이 책임을 맡고, 장의사(藏義寺)에 장소를 정해 문신들을 선정하여 공부시켜 많은 인재를 배출해냈다.
1456년(세조 2) 집현전이 폐지되면서 독서당도 함께 폐지되었으나, 1469년 성종(成宗)이 즉위하면서 집현전 제도를 회복하고 다시 사가제도(賜暇制度)를 부활하였다.
그러나 1504년(연산군10)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또다시 독서당이 폐지되는 등 우영곡절을 겪다가 1517년(중종 12)에 한강연안에 있는 두모포(豆毛浦 : 지금의 서울 성동구 옥수동)에 독서당을 신축하고 독서(讀書)를 실시하면서 호당(湖堂)이라 하였다.
임진왜란 때 병란으로 인해 불타 없어지고, 광해군(光海君) 때 다시 복구했으나 병자호란 때 없어졌다.
대추,밤,감은 필수적으로 젯상에 올려야 하는 이유?
우리 조상들의 유풍을 보면 어느 것 하나 허튼 것이 없다. 오늘날 우리가 예사로 보아 넘기지만, 그 속을 잘 들여다보면 고도의 상징과 합리성, 깊은 속뜻이 담겨 있어 경탄을 금치 못하게 된다. 그런 조상의 슬기가 배어있는 예를 하나만 이야기 해 볼까 한다. 바로 제수에 관한 것이다.
제사를 모실 때 보면 가가례라는 말이 있듯이 제수를 진설하는 방식은 지역마다, 집집마다 조금씩 다르다. 그리고 제수 역시 고인의 생전의 기호나 형편에 따라서 늘거나 줄기도 하고 독특한 것이 오르기도 한다. 하지만 과채탕적을 마련하고, 과일도 조율시이, 즉 대추, 밤, 감,배... 이런 순서로 놓아 가는 것에는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과일로는 오색 또는 삼색을 쓰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중요하게 치는 덕목 중의하나는 아무리 간소한 제사라 할지라도 삼색 과일은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라도 대추와 밤과 감―감이 없는 계절에는 곶감, 이렇게 세 가지는 반드시 쓰게 되어 있다. 만약 이것없이 제사를 지냈다면 그 제사는무효라며 다시 지내야 한다는 말이 나오기도 할 만큼 이 세 가지는 절대 빼놓지 않는다.
그런데 이것이 왜 그런가 하는이유를 아는 사람이 지금은 그리많지 않은 것 같다. 불과 수십 년 전만 해도 그것은 어느 집안에서나 어른들의 입을 통해 대대로 전승되던 고래의 상식에 속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전통문화와의 단절 속에서 그 전승도 끝이 소실되어 마치 아득한 먼 나라의 일인 양 여기게 된 것이다.다행히 어른들께 몇 마디 들은 바 있어 그 의미를 적어 본다.
첫째로, 대추를 쓰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빛깔이 좋아서도 아니요 맛이 좋아서도 아니다. 거기에는 상징적 의미가 있다. 대추의 특징이라면 한 나무에 열매가 헤아릴 수 없이 닥지닥지 많이도 열린다는 것이 되겠지만,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그것의 묘한 생리다. 그것은 꽃 하나가 피면 반드시 열매 하나를 맺고서야 떨어진다는 것이다. 아무리 비바람이 치고 폭풍이 불어도 그냥 꽃으로 피었다가 꽃으로만 지는 법은 없다. 그래서 만약 어느 해에 대추가 흉년이 들거나 풍년이 들었다면,그만큼 꽃이 적게 피었거나 많이핀 해라고 보아서 틀림이 없다는것이다.
꽃 하나가 반드시 열매 하나를맺고서야 떨어진다. 이것을 사람에게로 옮겨 놓으면 어떤 의미가 되겠는가?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반드시 자식을 낳고서 가야한다―그것도 많이 낳고서 가야 한다는 의미가 된다. 그래서 제상에 대추가 첫 번째 자리에 놓이는 것은 자손의 번창을 상징하고 기원하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한 집안에 후손이 끊어지면 그 집안이 망한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국가나 민족의 역사도 마찬가지다. 요즘은 극도로 산아제한을 해서 하나도 많다느니 하는 말들을 하지만, 생각해보면 걱정스러운 세태가 아닐 수 없다.
막 혼례를 올린 신부가 신부가시부모에게 폐백을 드릴 때, 시부모된 사람들이 대추를 한 웅큼새며느리의 치마폭에 던져 주는 것도 같은 상직적 의미가 있다. ‘아들 딸 구별 말고’대추 열듯이 많이 낳아, 자손이 번창케 하라는 것이다.
다음으로 밤을 꼭 쓰는데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밤이라는 식물도 생리가 묘하기는 마찬가지다. 한 알의 밤이 땅속에 들어가면 뿌리를 내리고 싹이 나서 줄기와 가지와 잎이 되어 성숙한나무를 이룬다. 여기까지는 여느 식물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런데 여느 식물의 경우 나무를 길러낸 최초의 씨앗은 사라져 버리지만, 밤만은 땅속에 들어갔던최초의 씨밤이 그 위의 나무가 아름드리가 되어도 절대로 썩지 않고 남아 있다. 얼마나 오랜 세월이 흘렀건 간에 애초의 씨밤은 그 나무 밑에 생밤인 채로 오래오래 그냥 달려 있다는 것이다.
나는 어렸을 적부터 그런 믿기어려운 이야기를 어른들로부터 수없이 들었는데, 정말 그런가 하고 궁금해 하기만 했지 정작 확인해 볼 기회는 없었다. 그런데 철 든 후 아버지의 산소를 모시고 그 경계를 꾸미려고 할 때에 어릴 적부터 누누이 들어온 그 이야기 생각이 났다.
대개 산소 주변에는 과일나무를 심는 법이다. 이것 역시 우리 조상의 슬기를 보여주는 한 예라고 할 것이다. 거기에는 ‘예출어정, ’‘정출어근’, 곧 예는 정에서 나오고 정은 가까운 데서 나온다는 생각이 바탕을 이루고 있다.
혈족이라 할지라도 가까이 지내지 못하면 정이 생기지 않고, 정이 생기지 않으면 예(공경하는마음)도 생기지 않는 법이다.
가령 상가에 문상을 가도 문상객 중에 어히곡을 하는 사람과 하지 않는 사람의 구별이 생기는데, 이때 기준이 되는 것도 고인과 얼굴을 아느냐 모르느냐이다. 가까이 해야 정이 생기고, 정이 있어야 슬픔이 있고 곡도 할 수 있다는 논리다.
그러니까 조상님 산소라고 해도 그것이 먼 조상의 것이면 자연히 돌보기가 힘들어지고 소홀해지게 마련이다. 할아버지까지는 얼굴을 안다지만, 증조, 고조그 윗 대로 올라가면 얼굴 한 번 뵌 적 없는데 그 손자 녀석이 알뜰히 돌볼 까닭이 있겠는가? 그래서 산소 근처에 유실수를 심어놓는다. 그 열매를 따먹으러나 오라는 것이다. 그래서 왔더라도 설마 거기 있는 조상의 산소 한 번 돌아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렇게 가까이 하게 해서 정을 쌓고, 정이 쌓이다 보면 예도 나올 것임을 믿었던 것이다.
나는 조상의 그런 슬기로운 유풍을 좇아, 아버지 산소 주변에 유실수를 심기로 하고 어느 농가에 가서 5년 생 밤나무 스무 그루를 샀다. 그것을 옮기기 위해 막 차에 실으려 하는데 예의 그 궁금증이 발동했다. 말로만 들었던 밤의 생리가 정말 그러한가확인을 해 보고 싶어진 것이다. 아름드리가 될 때까지도 씨밤이 생으로 남아 있다니까 5년생에도당연히 남아 있어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일부러 묘목의 뿌리 부분을 감싼 새끼를 풀고, 그 흙을 살금살금 파 보기 시작했다. 그것을 본 농장 관리인이 펄쩍 뚜이었다.
“아니,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그대로 가지고 가지 않으면 나무가 죽습니다!” “예, 예. 알겠습니다. 하지만 이 밤나무가 죽고 못 살아도 좋으니까 뭘 좀 꼭 볼 게 있어 그럽니다.”
나는 그런 말로 농장 관리인의만류를 뿌리치고 흙을 조심조심 다 털어냈다. 그랬더니 아니나 다를까, 씨밤이 정말로 생밤 상태 그대로 달려 있었다. 내 눈으로 그것을 직접 확인하게 된 것이다. 아버지 산소가에 그 밤나무들을 심은 지가 이제 20년 가까이 되었지만, 그 아래 흙 속에는 여전히 생밤을 달고 있으리라는 것을 나는 의심치 않는다.
밤의 생리는 이렇게도 묘하다.그래서 밤은 나와 조상의 영원한연결을 상징한다. 자손이 몇 십, 몇 백 대를 헤아리며 내려가더라도 조상은 언제나 나와 영적으로 연결된 채로 함께 있는 것이다. 지금도 조상을 모시는 위패, 신주는 반드시 밤나무로 깎는다. 밤나무가 특별히 결이 좋은 것도 아니요 향이 있는 것도 아닌데 반드시 그렇게 하는이유는 바로 밤나무의 그 상징성때문이다.
다음은 감이다. 감나무는 서울 이북, 그러니까 한강 이북에서는 서식하지 못한다. 지금은 기후가 따뜻해져서 서울에서도 감이 된다지만, 내가 어렸을 때는 서울에서 감나무를 구경도 할수 없었다. 그런데도 한국사람이라면 가령 함경도에 살건, 평안도에 살건 어디서나 제사 때는감을 올린다. 물론 곶감으로밖에 놓을 수 없지만, 어쨌든 꼭 쓰는 것이다. 감 없이 제사를 지낸다는 것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면 왜 감을 꼭 쓰는가? 다른 것이 아니다. 역시 감이 지는 묘한 생리 때문이다. 속담에 이르기를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고 한다.하지만 감 심은 데서는 절대로 감이 나지 않는다. 아무리 탐스런 감에서 나온 감씨를 심어도 거기서 나오는 것은 감나무가 아니라 고욤나무다. 감씨를 그냥 심기만 해서는 그 나무에 고욤이열리지 감이 열리지는 않는 것이다. 고욤은 생김새는 감을 닮았지만 크기는 도토리만 하고 떫어서 다람쥐 같은 들짐승들이나 먹지 사람은 먹지 못한다.
감나무를 만드는 방법은 이렇다. 감씨를 심으면 고욤나무가 된다. 그래서 3~5년쯤이 되었을때 그 줄기를 대각선으로 짼다. 그리고 기존의 감나무 가지를 거기에 접을 붙이는 것이다. 이것이 완전히 접합이 되면 그 다음부터 감이 열리기 시작한다. 만약 장난하기 좋아하는 사람이 줄기가 아니라 가지에 접을 붙이면, 한 나무인데도 이 쪽 가지에선 감이 열리고, 저쪽 가지에서는 고욤이 열리는 기묘한 일도 벌어진다. 감은 이렇게 묘한 과일이다.
이 감나무가 상징하는 바는 이렇다. 즉, 사람으로 태어났다고 다 사람이 아니라 가르침을 받고배워야 비로소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율곡 선생인 쓰신 <<격몽요결>>의 첫 장 첫 줄도 “인생사세에 비학문이면 무이위인 이니라.”하는 말로 시작하고 있다. 가르침을 받고 배우는 데에는 생재기를 째서 접붙일 때처럼 아픔이 따른다. 그 아픔을 겪으며 선인의 예지를 이어받을 때 비로소 진정한 하나의 인격체로 설 수 있다는 것이다.
이상이 대추와 밤과 감을 제상에 올리는 의미이다. 이렇듯 우리 조상들은 제물 하나를 차리는 데에도 자손에 대한 가르침을 염두에 두었다. 그런데 우리가 그가르침을 망각한 채로 제상에 이들을 올린다면 마치 돌을 올리는것과 다를 바가 무엇이겠는가? 100년 전도 아니고, 200년 전도 아니고, 당장 일제시대까지만 해도 이어져 내려오던 그 가르침들이 6.25 전란의 와중에서 망각에파묻히고 말았다. 이러한 조상의 슬기마저 낡은 것이라고 외면해 버린다면, 그것은 마치 조상 대대로 내려오던 수택 어린귀중한 골등품을 플라스틱 제품과 바꿔 쓰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함(銜)과휘(諱)
살아 있는 사람의 이름을 높여서 함(銜)이나 명함(名銜)이라 하고, 더 높여서 존함(尊銜)이 라고도 한다. 반면 돌아가신 분의 이름은 휘(諱)라 한다.
간행(刊行)과 증수보(增修譜)
족보 편찬위원회에서 의결한 보규에 따라 편찬하는 것이 원칙이나, 그 순서가 정해져 있지 않으며 다만 다음과 같은 순서에 의해 구성하는 것이 보통이다.
1.서문(序文)
족보를 발간(發刊)할 때 책머리에 실린다.
편찬(編纂)경위라던가? 그 동족(同族)의 연원 및 편성의 차례,서문을 쓴 사람의 소감등을 쓰는데, 일반적으로 직계후손 중에 덕망과 학식있는 사람이 기술하는 것이 보통이다.
2.영정(影幀)과 유적(遺蹟)
시조 이하 현조(顯祖)와 파조(派祖)의 영정(影幀)을 싣고, 조상이 제향된 서원(書院)이나 사우(祠宇), 영당 (影堂), 또는 신도비(神道碑), 정문(旌門), 제각(祭閣) 등의 사진을 싣는다.
3.세계도표(世系圖表)
시조(始祖)로부터 분파된 계열을 쉽게 알 수 있도록 도식한 표를 말한다. 대체적으로 파조(派祖)까지 도식 하는데, 족보(族譜)의 계보도(系譜圖), 손록(孫錄)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도록 파조(派祖)밑에 면수(面數)를 기록해 둔다.
4.묘소도(墓所圖)
시조(始祖)와 현조(顯祖), 파조(派祖)등 역대 유명한 선조 (先祖)분들의 분묘墳墓(무덤)의 위치와 지형을 그린 도면이다.
5.득성·득관세전록(世傳錄)과 관향(貫鄕)체명록
시조(始祖)의 발상과 득성·득관의 유래를 서문序文 (머리말)에 상세히 기록하지만 따로 득성관과 분관의 연유를수록하고, 시조의 고향 (故鄕)인 지명(地名)이 과거에서 부터 현재까지 변화해온 연혁(沿革)을 연대 별로 기록해 두는 것이다.
출계(出系)와계자(系子)
후사(後嗣)란 세계를 이을 자손을 말한다. 후사가 없어 대를 잇지 못할 때에는 무후(无后)라고 쓴다. 무후는 무후(無後)와 같은 의미이다. 무후가(无后家)로 하지 않고 양자를 맞아 세계를 이을 때는 계자(系子)라고 써서 적자와 구별한다. 계자의 경우는 세표에 생부(生父)를 기록한다. 또 생가의 세표에는 출계(出系)라고 쓴다. 양자를 들일 때는 되도록 가까운 혈족 중에서 입양한다. 또 호적이 없는 자를 입적시켜 세계를 잇게 하는 경우는 부자(附子)라고 쓴다. 옛날에는 적자 이외의 자로 세계를 잇고자 할 때는 예조(禮曹)의 허가를 얻어야 했으며 파양(罷養)을 하고자 할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항렬(行列)과 항렬자(行列字)
항렬(行列)이란 같은 혈족사이의 世系(세계)의 위치를 분명히 하기 위한 문중율법이며, 항렬자(行列字)란 이름자 중에 한 글자를 공통적으로 사용하여 같은 혈족, 같은 세대임을 나타내는 글자로써 돌림자라고도 한다.
선조들은 자손들의 항렬자를 만드는 배합법까지를 미리 정해놓아 후손들이 그것을 따르도록 해 놓았다.
항렬은 家門(가문)과 派(파)마다 각기 다르나 대략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항렬자를 정한다.
五行相生法(오행상생법)으로 쓰는 경우 : 오행의 기본인 金·水·木·火·土(금.수.목.화.토)가 포함된 글자를 변으로 하여 앞,뒤 이름자에 번갈아 쓰는 경우인데 대개 이를 가장 많이 따른다.
十干(십간)순으로 쓰는 경우 : 甲·乙·丙……壬·癸(갑·을·병……임·계)를 순차적으로 쓴다.
十二支(십이지)순으로 쓰는 경우 : 子·丑·寅……戌·亥(자·축·인……술·해)를 순차적으로 쓴다.
숫자를 포함시키는 경우 : 일(一:丙·尤)·이(二:宗·重)·삼(三:泰)·사(四:寧)등으로 쓰는 경우.
같은 시기의 항렬은 長孫(장손=종가의 후손)계통일수록 낮고 支孫(지손=지파의 후손)계통일수록 높아서, 자기보다 나이가 적어도 할아버지뻘이 되는 경우가 있어 존대어를 쓰는 경우가 허다하다.
始祖·鼻祖·中始祖(시조·비조·중시조)
始祖(시조)란 제일 처음의 先祖(선조)로서 첫 번째 조상이며, 鼻祖(비조)란 시조 이전의 先系祖上(선계조상) 중 가장 높은 사람을 일컫는다.
中始祖(중시조)란 시조 이하에 쇠퇴한 가문을 일으켜 세운 조상을, 모든 종중의 공론에 따라 정하여 追尊(추전)한 사람이다.
'세상사 이모저모 > 평산신씨 역사 ~~'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제사(祭祀) 지내는 순서 (0) | 2011.11.17 |
---|---|
☞.제사시 지방 쓰는 법 (0) | 2011.10.31 |
[스크랩] ☆.장절공 할아버지 묘역 (0) | 2010.05.26 |
[스크랩] 신립장군의 충정이 서린 탄금대 (0) | 2010.05.07 |
☛.나이의 호칭 및 생신 명칭 (0) | 2010.04.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