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고무신 부부

달성_도동서원, 2020.10.02 본문

세상사 이모저모/역사의 발 자취

달성_도동서원, 2020.10.02

백고무신 부부 2020. 10. 3. 10:29

달성_도동서원 :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에 있는 서원. 1605년(선조 38) 지방 유림의 공의(公議)로 김굉필(金宏弼)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607년 ‘道東(도동)’이라고 사액되었으며, 1678년(숙종 4) 정구(鄭逑)를 추가 배향하였다. 오늘날까지 한국에서 교육과 사회적 관습 형태로 지속되어온 성리학과 관련된 문화적 전통의 증거이며 성리학 개념이 여건에 맞게 바뀌는 역사적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가 인정되어 다른 서원 8곳과 함께 한국의 14번째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9개 서원은 소수서원(1543년 건립), 남계서원(1552년 건립), 옥산서원(1573년 건립), 도산서원(1574년 건립), 필암서원(1590년 건립), 도동서원(1605년 건립), 병산서원(1613년 건립), 무성서원(1615년 건립), 돈암서원(1634년 건립)이다.

 

 

 문경공 한훤당 김굉필(文敬公 寒暄堂 金宏弼) 선생 흉상이 대구시 달성군 현풍면에 세워져 있다. 달성군(군수 김문오)은 군청 개청100주년을 맞아 한훤당 선생을 '달성을 빛낸 역사적 인물' 7인 중의 한 분으로 선정하고 현풍면 소재 달성종합스포츠파크에서 제막식을 가졌다.
김굉필(金宏弼, 1454년 ~ 1504년 10월 7일)은 조선 전기의 문인, 교육자, 성리학자, 화가로 호(號)는 한훤당(寒暄堂)·사옹(蓑翁),[1] 또는 한훤(寒暄), 말곡(末谷[2])이며 자(字)는 대유(大猷),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점필재 김종직의 제자로 김일손, 김전, 남곤, 정여창 등과 동문이었다. 《소학》에 심취하여 스스로 '소학동자'라 칭하였고, 《소학》의 가르침대로 생활하였다.
1472년(성종 3년) 19세 때 경상도 합천군 야로 말곡 남교동(현 경남 합천군 가야면 대전리 남교마을)에 사는 순천 박씨(朴氏) 가문으로 장가들었다. 처가 주변 개천 건너 지동(地東)이라 부르는 작은 바위 아래에 조그마한 서재를 짓고 한훤당(寒暄堂)이라는 당호를 붙였다. 이후 김굉필은 한훤당을 자신의 호로 삼았다.
김종직의 문하에서 수학하다가 1480년(성종 11) 식년과 생원시와 초시에 합격하고, 다시 성균관에 들어가 유생으로 수학하였다. 1494년(성종 25년) 훈구파 출신 경상도관찰사 이극균(李克均)에 의해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출사하여 합천(陜川) 일민(逸民)으로 주부(主簿), 사헌부감찰, 형조좌랑 등을 지냈다. 1498년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연좌되어 평안도 희천에 유배되었는데, 그곳에서 지방관으로 부임한 조원강의 아들 조광조(趙光祖)를 만나 학문을 전수하였다. 순천군으로 이배되어 1504년 갑자사화로 시장에서 사형되었다. 중종 반정 후 복권되어 승정원도승지에 추증되고, 1517년 증 우의정, 1575년 증 영의정에 거듭 추증되었다.
그는 1484년 10월 스승 김종직이 이조참판이 된 뒤에도 훈구파에 대해 간하지 않자, 이를 계기로 풍자시를 지었다가 김종직과 결별하게 되었다. 그 자신도 조광조·이장곤·주계정 이심원·김안국·이연경 등의 제자들을 배출했으며, 김종직 사후 사림의 영수로 추대되었다. 김굉필의 문인들과 이들의 학통은 후대에 가서 조광조, 백인걸의 학통과 함께 기호 사림파를 거쳐 서인학파를 이루게 되었다. 《소학》을 행동의 근간으로 삼아 《소학》을 알지 못하고는 사서육경을 알 수 없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본관은 서흥(瑞興)이며, 한성부 정릉동에서 태어났다. 문묘에 종사된 동방5현 중의 한 사람이다.

 

노수송 (한그루 늙은 소나무 길가에 서 있어 괴로이도 오가는 길손 맞고 보내네 찬 겨울에 너와같이 변하지 않는마음 지나가는 사람중에 몇이나 보았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