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여! 백 고무신
◈ 문경 새재에 얽힌 신립장군의 전설 본문
◈.문경새재의 유래
◈ 문경 새재에 얽힌 신립장군의 전설
과거를 보러 한양으로 가던 젊은 신립은 문경새재[鳥嶺]를 넘다가 날이 저물어 한적한 외딴집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그런데 그 집에 사는 처녀는 극구 다른 곳으로 가서 자라는 것이었다.
사연을 들으니, 이 집은 부잣집으로 머슴을 두고 농사를 지었는데, 머슴 중에 힘이 장사인 한 머슴을 그 처녀의 아버지가 심하게 꾸짖고 쫓아버리자, 그는 앙심을 품고 해마다 이 집에 찾아와 차례로 가족을 죽였고, 마침내 오늘은 자기가 죽는 날이라는 것이었다.
의협심이 강하고 또한 무과 시험을 보러 가는 처지라 그 처녀를 살릴 결심을 한 신립은 부득이 잠자리를 잡았다. 저녁상을 물린 후 잠을 청하는데, 갑자기 땅이 울리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활시위에 화살을 메긴 신립이 문을 향하여 화살을 쏘자, 그 거인은 한 손으로 그 화살을 막아내었고, 두 세번 재차 활을 쏘았으나 그 때마다 간단히 화살을 막아내는 것이었다. 두려운 마음이 든 신립은 마지막으로 온 힘과 정신을 기울여 힘껏 쏘니 다행스럽게도 화살이 명중하여 거인은 큰 소리로 비명을 지르며 넘어졌다.
거인을 죽이고 하룻밤을 묵은 신립이 다음날 떠나려 하자 그 처녀는 자기를 거두어 달라고 청하였다. 이미 장가를 갔고 또한 과거를 보러 가는 길이라 신립은 그 처녀의 청을 거절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처녀는 부실로, 그것도 어려우면 종이라도 좋으니 데려 가면 죽을 때까지 모시겠다고 애원하였다.
그러나 마음이 굳은 신립이 그 소망을 뿌리치고 단숨에 산등성이를 넘으려는 찰나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났다. 뒤를 돌아보니 처녀가 집에 불을 지르고 지붕 위에서 신립을 부르고 있는 것이었다.
깜짝 놀라 급히 달려갔으나 그만 집이 무너지면서 그 처녀는 불에 타 죽고 말았다. 과거에 급제한 신립이 싸움터에 나갈 때면 항상 그 처녀는 요귀가 되어 작은 소리로 싸울 계책을 일러주었고, 그 계책대로만 싸움을 하면 언제나 적을 무찌를 수 있었다.
어려울 때마다 그 처녀를 생각하면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 계책을 알려 주니, 신립은 마치귀신에 홀린 사람 같았다. .하루는 낌새를 알아차린 장인이 그 연유를 묻자, 처녀와 있었던 일을 모조리 이야기하였다.
그러자 장인은 주문을 외워 그 요귀를 병속에 넣고 마개를 막은 뒤, 장차 해를 끼칠 것이니 절대로 이 마개를 열어서는 안 된다고 일러 주었다.
이 일이 있은 후 그 처녀의 소리는 다시 들리지 않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조령에 진을 친 장군은 불안한 마음에 그 처녀의 소리를 들으려고 병마개를 열었다. 그러자 아주 조그맣게, [탄금대. 탄금대]라고 하면서 푸른 연기가 하늘로 사라졌다. 그러자 신립은 산세가 험한 조령에 진을 치자는 부하의 건의를 무시하고 탄금대에 배수진을 쳤다.
▲ KBS 사극촬영장
◈ 탄금대에 친 배수진
신립(申砬, 1546~1592) 장군은 본관이 평산(平山)이고 자는 입지(立之)이며, 아버지는 생원인 화국(華國)이다. 어릴 때부터 글 보다는 무예 닦기를 좋아하여 드디어 23세 때 무과에 급제하였다.선전관․도총관․도사의 벼슬을 거쳐 진주 판관(晋州判官)으로 나갔을 때, 진주에는 문장가로 이름난 양응정(梁應鼎)이란 사람이 목사로 있었다.
양응정은 신립의 성격이 거칠고 학문이 깊지 않음을 염려하여“공은 큰 그릇이니 불가불 배워야한다.” 하며 공부할 것을 종용하자, 신립은 그 때부터 학문을 닦기 시작하였다.
1583년 온성부사로 북방을 지키고 있을 때, 여진족 니탕개(尼湯介)가 거느린 야인이 훈융진(訓戎鎭)을 공격하였다. 그러자 신립은 이박(李璞)과 힘을 합하여 야인 50여 명을 베고, 이어 두만강을 건너 끝까지 추격하여 적의 소굴까지 소탕하였다.
장군은 평상시 철기(鐵騎) 5백여 명을 정병으로 훈련시켜 적을 공격하였는데, 어찌나 첩하였는지 야인들은 감히 육진(六鎭)을 넘볼 수 없어, 육진은 오로지 그의 용맹 때문에 지킬 수 있었다.
1584년 선조 임금은 장군을 함경도 북병사에 임명하고, 무관의 공복인 남철릭(藍天翼)과 환도(環刀), 그리고 수은갑투구(水銀甲頭口)를 선물로 주었으며, 늙은 어미에게는 매일 고기와 술을 보내어 위로하였다.
1587년 전라도 흥양(興陽)으로 왜구가 쳐들어오자, 장군은 우방어사(右防禦使)에 임명되어 군관 30명을 이끌고 토벌에 나섰지만, 이미 왜구가 철수한 뒤라 되돌아 왔고 이 때 양가집 딸을 첩으로 삼았다는 삼사(三司)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으나, 곧 함경도 남병사에 임명되었다. 신립은 용감한 장군이었지만 여러 번 탄핵과 복직을 거듭하였고,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삼도 순변사에 임명되어 보검을 하사 받았다.
[징비록]에는, 신립이 충주를 향하여 떠날 때, 선조 임금이 그를 불러 보검을 내리면서, [이일(李鎰) 이하가 영(令)을 듣지 아니하거든 이 칼을 쓰라]라고 명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명을 받은 장군은 유성룡(柳成龍) 막하의 부장 김여물(金汝岉)과 80명의 군관, 그리고 시정의 의병을 이끌고 충주에 도착하였고, 이어 조령(鳥嶺)으로 내려가 지형을 살폈다.
군관 40명과 군졸 4천 명을 이끌고 남하하였던 이일(李鎰)이 경상도 상주에서 왜군에게 패하고 도망쳐 와 신립 앞에서 무릎을 꿇고 죽여 줄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신립은 그의 재주를 아껴 용서하고 오히려 선봉장으로 삼았다.
그러자 이일은 왜군이 대군이라 쉽게 대적할 수 없다 하고, 김여물은 아군의 수가 열세라 험한 조령에서 잠복하여 전투를 벌일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신립은 어떠한 생각에서인지 아군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넓은 들판에서 기병의 활용을 극구 주장하며 군대를 돌려 충주에서 10리 정도 떨어진 탄금대(彈琴臺)에 배수진을 치고 임전태세에 들어갔다.
4월 28일, 배수진을 친 조선군이 조총을 쏘며 몇 겹을 에워싸고 공격하는 왜장 고니시(小西行長)에게 무참히도 무너지니, 신립은 김여물과 함께 적 수십 명을 베고 강에 투신 자살하였다. 훗날 영의정에 추증되고 시호는 충장(忠壯)이 내려졌다.
▲ 신립장군이 장열히 전사한 탄금대
◈ 불길한 징조(徵兆)
당시의 정황은 「일월록」등 여러 문헌에서 자세히 알 수 있는데, 장군이 충주로 떠날 때 임금이 그를 불러 적의 세력이 어떠냐고 물었으나, 신립은 적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었다.
그러자 임금이 장군에게 말하기를, [변협(邊協)은 매양 왜인은 가장 대적하기 어렵다 하였는데, 경은 어찌 쉽게 말하는가]하였다. 신립이 물러난 뒤 임금은 "변협은 진실로 양장(良將)이라 내가 항상 이 사람을 잊지 못한다. 변협이 있었던들 어찌 왜적을 걱정할까
(변협은 3년전에 죽음)"라고 하였다.
어전을 물러 난 신립이 빈청(賓聽)에 나가 대신들과 하직하고 섬돌을 내려 오는데,갑자기 머리에 쓴 사모가 홀연히 땅에 떨어져, 이를 본 사람들이 모두 불길한 징조라고 실색하였고, 용인에 이르러 그가 올린 장계에 서명이 빠지자 사람들은 그가 마음이 착란되지 않았나 의심하였다. 이 때 그는 시정의 의병들로 이루어진 군대를 이끌고 충주로 가던 중이었는데, 용인에 이르러 적의 세력이 대단하다는 말을 듣고, "적세가 심히 성해서 실로 막아낼 일이 어려우니 오늘의 일은 민망하고 딱하기 그지 없다."라는 장계를 올려 장군을 믿었던 조정은 겁을 내었고, 민심은 더욱 흉흉하여 졌다.
김여립이 말하기를, "적의 기세가 날래어 맞대고 싸우기 어려우니 새재(鳥嶺)를 지키는 것이 옳을 것 같오." 하니 장군은, "바다를 건너 온 적은 능히 달리지 못한다. 적은 보병이고 우리는 기병이라 넓은 들판에서 기병이 짓밟으면 이기지 못할 리가 없다."라고 하였다.
김여립이 또 말하기를, "먼저 고지를 점령한 후 역습을 합시다."하니 장군은 고집을 부리고 배수진을 쳤다. 싸움이 시작되자 아군은 모두 달아나고 장수와 졸병은 엉겹 결에 모두 강물로 뛰어 들었고, 적의 칼에 쓰러진 시체가 강을 메웠다.
장군이 김여물을 불러, "자네는 살려고 하는가."하니 김여물은 웃으면서, "어찌 나의 죽음을 아낄 것이라 하시오."하고 함께 적 수십 명을 죽이고 물에 빠져 죽었다.
▲ 경기 광주시 실촌면 신대리에 있는 신립장군 묘소
◈ 목이 부러진 동자상(童子像)
마을 중앙에서 모퉁이를 돌아 가면 거목이 된 모과나무가 계단 앞에 서 있고, 그 옆에는 신립 장군의 묘임을 알리는 안내판이 서 있다.
산 위로 난 돌계단에는 이끼와 잡초가 자라 있어 오랜 세월이 지났음을 알려 주고,
한참을 오르니 계단 위에 묘 1기가 있으며, 그것을 지나 조금 더 오르면 묘 3기가 나란히 있다.
장군의 묘는 맨 윗 쪽 것인데, 앞쪽에는 문신석이 좌우로 둘 있고, 그 앞에는 망주석과 동자상이 마주 보며 서 있다. 묘 왼쪽에 있는 화강암 묘비에는 [贈領議政平陽府院君行漢城府判尹兼八道巡邊使申公砬之墓]라 쓰여 있고, 그 옆에는 [貞敬夫人全州崔氏祔左]라 쓰여 있다.
세월이 흘러 석물에는 곳곳에 이끼가 끼고 봉분 또한 군데군데 잔디가 헐었는데, 정작 놀라운 것은 동자상이다. 누가 그랬는지 동자상의 머리를 부러뜨려 시멘트로 붙여 놓은 것이다.
추측하건데, 일제 때 일본놈들이 도끼로 내리쳐 목을 부러뜨린 것으로 보인다. 이곳의 동자상만 그런 것이 아니라 그 밑에 있는 두 묘의 동자상도 모두 목을 부러뜨려 시멘트로 붙였는가 하면, 어떤 것은 머리가 없어져 시멘트로 머리의 형상을 만들어 붙여 놓은 것도 있다.
잘 보존되어야 할 문화유산들이 이렇듯 질곡(桎梏)의 역사속에서 수난을 당하였으니, 국력이 약했던 지난날의 우리가 부끄럽고, 다시는 이러한 역사를 되풀이 하지 않아야 하겠다고 느끼며 헛제비는 산을 내려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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