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여! 백 고무신
★.한천 처사공 신숙빈(寒泉 處士公 申叔彬) 본문
한천 처사공 신숙빈(寒泉 處士公 申叔彬) 1457세조 3년 ∼ 1520 중종15년)
문희공(文僖公) 개(개)의 손이며, 대사성(大司成) 자승(自繩)의 여섯째아들이다. 문장(文章)과 행의(行誼)가 당세(當世)에 고명(高名)하신 학자였으며 호는 한천처사이다. 음직으로 사헌부 감찰(監察) 거창현감(縣監)을 지내셨다.
태종대왕(太宗大王)의 제3녀인 정선공주(貞善公主)의 외손(外孫)이시기도 한다. 연산 무오(1498)에 거창현감으로 있다가 어진 선비들이 주륙됨을 보고 관직을 버리고 빙장인 사직(司直) 안귀손공(安貴孫公)과 더불어 가족을 이끌고 남하하여 문경 가은 소양의 양지에 복거(卜居)하시며 정자(上江亭)를 짓고 스스로 처사라 호(號)하셨다.
향방(鄕邦)의 후진(後進)들과 원근(遠近)의 사우(士友)들이 바람처럼 듣고 책상을 지고 찾아오는 이가 많으니 선생께서 더욱 겸손하셔서 사도(師道)로써 자처하시지 않으시고 자세하게 가르치는데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으셨다.
얼마 안되어서 중종(조선 11대왕)이 등극하시어 여러 차례 부르고 벼슬을 권하면서 사례(思禮)가 갖추어 이르렀으되 고루 하신 지개(志介)는 한결 같이 『내가 대대로 큰 벼슬한 명문으로 혼조(昏朝)를 만나서 어진이들을 죽여 없애던 날에 능히 한마디 말로 바르게 구해내지 못하였는데 마침 성명(聖明)을 만나서 도리어 사명(思命)을 받는다는 것은 나의 죄이다』하시며 고사 하시였다.
돌아가실 때 말하기를 『나 죽은 뒤에 묘 앞에 작은 돌로 처사신모지묘(處士申某之墓)라고만 쓰고 지문(誌文)과 행장(行狀)을 지어서 나의 죄를 무겁게 하지 말라』고 유언하였다.
일찍이 시를 지어 자신의 뜻을 보였으니 有山有水處 無榮無辱身 耕田消白日 採藥送靑春 (산있고 물있는 곳 영화도 욕됨도 없는 내몸, 밭 갈아 날 보내고 약초 캐며 청춘을 보냈도다.)
문경 가은의 신씨 (처사공 종중)
문경 가은의 신씨 처사공파의 문경 가은 무두실에 정착한 경위는 다음과 같다.
먼저 처사공께서 문경 가은에 정착한 것은 지금부터 500년 전 1498년 연산무오사화 때에 문장(文章)과 행의(行誼)가 당세(當世)에 고명(高名)하신 학자 한천처사공(문희공의 손자:신숙빈)께서 벼슬을 버리고 령(領)을 넘어 문경 가은에 오셨다.
이후 중종이 여러 차례 공(公)을 조정으로 청하였으나 『내가 대대로 큰 벼슬한 명문으로 혼조(昏朝)를 만나서 어진이들을 죽여 없애던 날에 능히 한마디 말로 바르게 구해내지 못하였는데 마침 성명(聖明)을 만나서 도리어 사명(思命)을 받는다는 것은 나의 죄이다』하시며 고사 하시였다.
처사공께서 문경 가은(전곡리 소양)에 사신 이후 지금까지 자손이 이어지면서 20여세가 지났다. 처사공께서는 자손을 다섯 분을 두시어 후손들이 전곡리, 민지리 및 농암리 일대에 집성촌을 이루었고, 19세할아버지 계(示契)께서도 농암 가실목(加項)에서 집성촌을 이루며 사시며 자손들을 가항파(加項派)라 하였다.
우리집은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왜군과의 싸움에서 순절한 700의사의 묘(금산, 칠백의 총)에 계신 22세할아버지 좌승지 경일(慶一)의 셋째아들 탁(鐸)으로부터 계속 14대까지 종손으로 이어져 14대 종가(재선)집으로 이르고 있다.
농암 가실목(현 농암초등학교 터)에서 잘 사시던 중 선조님께서 묘소를 정할 때였다. 지관이 두 명당자리를 추천하였는데 한 장소는 "여기에 묘소를 정하면 자손들이 만석지기로 부자가 될 것이요." 다른 장소는 "이후 8대손 후손에서 혈식군자(혈식천추 도덕군자(血食千秋 道德君子) :선도문화가 꽃피었던 고조선시대 이후로 도덕군자가 되고자 뜻을 세운 이들이 함께 모여 자신들의 피를 섞어 나누어 마심으로써 영원토록 그 의지가 흔들리지 않도록 다짐한 군자)들이 추앙하는 인물이 배출되나 집안의 자손이 귀하게되며, 집안의 부는 가난이 극에 달할 것"이라 하였다.
선택은 부보다는 명예를 중요시한 선조께서는 후자 쪽으로 택하시였다. 이후 정말로 자손은 독자만 나오든지 아니면 양자를 들여야 하였다. 또한 집안에 불이 발생하여 가옥이 전소되고 소 십여 마리가 불타는 등 재난이 시작되고 가세가 기울기 시작하였다. 이에 재난을 피하고자 31세할아버지 국희(國熙)께서는 식솔만 이끌고 문경일대를 사시다가 무두실로 이거하시어 정착하게 되였다.
오호! 안타깝구나. 이후 자손 8대에 거의 이르러(약 6대정도) 그 명당자리가 성묘가 힘들다고 후손들이 이장을 하기로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어른들은 이장을 못하도록 부랴부랴 묘소를 찾아갔으나 이미 때는 늦어 산밑에 다다랐을 때에 개장을 하여 묘소 위치에서 흰 기운이 연기처럼 피어오르는 것이 아닌가! "과연 기운이 하늘로 솟는 것으로 보아 틀림없이 명당이거늘 생각이 부족한 너희들로 인해 애석한 일이 되었다."라고 했다고 한다.
이후부터는 옛 영화는 찾지 못하였지만 어느 정도 자손도 번창하고 가문을 일으키면서 평산신씨 가문의 그 정신은 뚜렷이 계승하여 매사 하는 일은 주위의 표본이 되고 마을의 중심이 되어 내려 왔다. 기나긴 세월을 지나온 사이 선조분께서는 교목(喬木)세가(世家)의 후예로서 명예를 지키고, 이 고장 주민으로서 빛나는 자취를 남기셨다. 가은에 오신 한천처사공께서는 중시조 문희공의 손자이므로 문희공 이후세대의 우리집 직계 선대의 약전(略傳)을 보면 더욱 교목세가의 자부심을 가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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