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향교(鄕校), 서원(誓願), 서당(書當) 탐방 어디까지 가 봤나요? ①~②~③~④~⑤에 이어 탐방은 계속 이어집니다.
⑥.(No76~90) : 암포서원, 암포서당, 해인재, 백인당, 덕암서원, 조곡서원, 도동서원, 자인향교, 용계서원, 도천서원, 경산향교,

No 76.☞. 언제? 어디를? = 2026.06.16. 성주군 월항면 안포길 89에 위치한 암포서원(巖浦書院)은(는) 선조들을 제사하고 유생을 교육하던 서당이자 사당으로, 1569년(선조 2)에 서원으로 승격된 역사적인 장소입니다. 고종 때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60년 및 2007년에 걸쳐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되었습니다.

2007년5월13일 성주향교 유림 및 각 문중대표 주관으로 낙성고유식을 거행하였다. 건물의 공간적인 구성은 풍수지리학적 지형지세에 따라 서원의 우측으로 사당을 배치하였으며, 서원(書院)ㆍ사당(祠堂)ㆍ단목(壇木)ㆍ단정(壇井) 등이 있다.

듬개연못

No 77.☞. 언제? 어디를? = 2026.06.16. 성주군 월항면 안포길 89에 위치한 암포서당(巖浦書當)

No 78.☞. 언제? 어디를? = 2026.06.16. 성주군 월항면 한개1길에 위치한 해운재(海雲齎)은(는) 문도 걸려 있고 안내판도 없어서 어느 문중의 재실인지는 알 수가 없으나 암포서원(巖浦書院) 및 덕암서원(德巖書院), 백인당(百忍堂) 등과 인접해 있으며, 주변의 고즈넉한 풍경과 어우러져 한옥의 전통미를 잘 보여주는 건축물입니다.

No 79.☞. 언제? 어디를? = 2026.06.16. 성주 군 월항면 안포리 535에 위치한 백인당(百忍堂)은 경산이씨(京山李氏) 집성촌인 백인마을의 상단 검암산(儉岩山)기슭에 남향으로 자리하고 있는 재실(齋室)로 학가재(學稼齋)는 이주와 사월정(沙月亭) 이륜(李綸)이, 1661년(현종 2)에 선조인 소부윤(少府尹) 이함(李)과 양양부사(襄陽府使) 이번(李蕃), 대사헌(大司憲)이흥문(李興門)을 추모하는 대종재(大宗齋)로서 건립하였다.
백인당(百忍堂)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규모로 팔작지붕을 올렸으며, 화강암(花崗巖)을 사각으로 다듬은 돌 기단 위에 중앙의 2칸 마루를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배치한 중당협실형(中堂夾室形)의 구조로 되어 있으며, 앞쪽만 원형기둥을 세우고 장식성이 없는 간결한 구조에 상부가 좁고 하부가 넓은 제형판대공(梯形板臺工)을 얹어 지붕을 받치도록 되어 있으며 양쪽 온돌방 앞쪽으로 퇴칸을 두고 난간을 세워 집의 격을 높였습니다.

백인당(百忍堂)의 유래는,
당나라 고종이 태산(泰山)에서 천제(天祭)를 지내고 운주를 지나는 길에 장공예(張公藝)의 집에 들러 그들이 화목한 비결을 물었을때 장공예(張公藝) "참을 인(忍)" 100자를 써서 올렸는데 "백인당중유태화(百忍堂中有太和 : 백번 참는 가운데 가정화목이 있다)”란 말이 유래가 되어 백인당(百忍堂)은 화목한 가족의 대명사로 널리 쓰이게 되었다고 하며,
또한, 백인당(百忍堂)은 종친간의 화목을 바라는 뜻에서 “인지위덕(忍之爲德), 내이위인(耐以爲仁)”이라는 성현(聖賢)의 말에서 따왔다고도 전하며 경산이씨(京山李氏) 집성촌인 마을 이름도 백인당(百忍堂)의 당호(堂號)를 따라 "백인마을"이라 부르고 있다고 합니다.

백인당 (百忍堂) 향나무 : 백인당 경내에는 수령이 약 530년 이상 된 높이 10m, 둘레 1.3m의 보호수 향나무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대사헌을 지낸 이흥문이 제주 유배 생활을 마치고 돌아와 심었다고 전해집니다.

No 80.☞. 언제? 어디를? = 2026.06.16. 성주군 월항면 유월3길 29-72에 위치한 덕암서원(德巖書院)은(는) 경산 이씨인 이천배·이천봉·이주를 추모하기 위해 도내 유림에서 세운 건물이다.
이천배와 이천봉은 형제 사이로 함께 정구에게 가르침을 받았는데, 이 중 이천봉은 정묘호란 때 성주에서 의병을 일으킨 공으로 벼슬을 지냈다.

덕암서원(德巖書院)은 조선 현종 13년(1672)에 세운 이 서원은 처음에는 성현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기능만 담당하는 덕암사로 세웠다. 고종 5년(1868)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해체되었다가, 고종 13년(1876) 덕암서당으로 고쳐 세우면서 교육 기능도 겸했던 것으로 보인다.

대문 격인 건명문을 들어서면 남동향으로 서당이 자리하고 있다. 앞면 5칸·옆면 3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가운데 2칸은 마루를 만들고 양 옆으로 온돌방을 배치하였다. 지붕에서 느끼는 완만한 곡선이 돋보이는 간결하면서도 아름다운 건축물이다.

덕암서원(德巖書院)에 제향 된 이천배와 이천봉은 형제 사이로 함께 한강(寒岡) 정구(鄭逑)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는데, 이천봉은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자 성주에서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웠다. 이주는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백인당을 세워 후진교육에 힘쓰는 한편 동규(洞規)·향약(鄕約)을 정비하기도 하였다.

관항루(觀恒樓)는 이 덕암서원의 정문이자 누각 건물로, 서원의 입구에 자리 잡고 있어 아름다운 주변 풍경과 서원 내부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멋진 공간입니다.

덕암서원에는 경산이씨 유학자인 이천배, 이천봉, 이주를 기념하여 건립하였다. 이천배와 이천봉은 형제 사이로, 이천배가 형, 이천봉이 동생이다. 그리고 이주는 이들의 조카이다. 이천배와 이천봉은 정구(조선 중기 문신 겸 학자)로부터 가르침을 받았고, 이주는 장현광(조선 중기 학자)에게 수업을 받았다. 특히 이천봉은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성주에서 의병을 일으켰고, 그 공으로 관직이 내려졌으나, 나가지 않았다. 이듬해 "의금부도사"에 임명되었다.

No 81.☞. 언제? 어디를? = 2026.06.21. 조곡서원(早谷書院)은(는) 고려 후기 홍건적 토벌에 공을 세운 문충공 오성군 안우(文忠公 鰲成君 安祐,?~1362)와 그의 4세손 문정공 고은 안지(文靖公 皐隱 安止,1384~1464)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자 정조 18년(1794)에 영남지역 유림들과 순흥안씨의 후손들이 세운 서원이다.
고종 5년(1868) 흥선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서원이 헐렸다가, 이듬해 지금 자리에 교육 공간이 상경재(尙敬齋)가 다시 지어졌고, 1900년에는 상경재 뒤에 사당인 충현사(忠賢祠)가 지어져 그곳에서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다. 지금도 해마다 음력 2월에 제사를 지낸다.

조곡서원(早谷書院)은 매년 음력 2월 중정(中丁)에 향사를 지내고, 남산면 조곡리에 세거하는 탐진 안씨 후손들과 조곡서원보존위원회에 의해 관리되고 있으며, 내부에 전국탐진안씨보학교육본부가 설치되어 있다. 한편, 내부에는 1833년(순조 33)에 이현(李鋧)이 쓴 「서원창건기(書院創建記)」를 비롯한 여러 점의 편액과 기문 현판이 걸려 있다. 또한, 조곡서원이 소장해 오던 「용비어천가」 필사본, 『고은집(皐隱集)』 초간본, 「향사홀기(享祀笏記)」 등은 경산시립박물관에, 『고은집』 목판은 한국국학진흥원에 각각 위탁되어 있다고 한다.

안우는 고려 공민왕 때 도원수(都元帥)로서 홍건적을 토벌하는데 공을 세웠으며 조선 문종 2년(1452)에 경기도 연천에 있는 고려 종묘인 숭의전(崇義殿)에 모셔졌다. 안지는 세종 27년(1445)에 공조참판으로 권제,정인지 등과 함께 <용비어천가>를 지었다. 서원에는 안지의 후손이 베겨 쓴 <용비어천가>가 있다.
*도원수(都元帥):고려말 조선시대에 외적방어, 국외 원정, 내란 진압을 위해 문신인 유장을 임명하여 군대를 통솔 하던 임시 관직 무신을 부원수로 임명한 것과 달리 문신을 도원수로 임명한 것은 문치주의 사회였던 조선 왕조의 특성이 반영된 결과이다.

No 82.☞. 언제? 어디를? = 2026.06.21. 경산시 남산면 하대리 175-1에 위치한 도동서원(道東書院)은(는) 1605년(선조38) 지방 유림에서 한훤당, 김굉필 선생을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서원으로 조선중기 전학후묘(前學後廟)의 전형적 배치형식과 강당과 사당의 공포양식 및 담장 구성수법 등에서 건축적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배향 인물 : 신라 3대 문장가이자 이두를 집대성한 유학의 선구자 '총지(聰智)' 설총
역사적 유래 : 1864년(고종 1년)에 설총을 제향하기 위해 '도동단(道東壇)'이 세워진 것이 시초입니다. 이후 1923년 지역 주민들이 '도동재'를 건립하였고, 2010년에 명칭을 '도동서원'으로 변경하였습니다.

주요 시설 : 설총을 모시는 사당인 '경모사(景慕祠)'가 있으며, 서원 바로 옆에는 설총의 가묘가 남아 있습니다.

도동서원(道東書院) 이름의 유래 : '도동재'라는 이름은 설총이 경주로 가던 길에 동쪽 길목에서 쉬어갔던 곳이라는 의미에서 유래되었습니다.
환경 : 삼성현(원효, 설총, 일연)의 고장인 경산에서 한옥의 고즈넉함과 전통 유학의 정취를 조용하게 느낄 수 있는 숨은 명소입니다.
강당·사당과 이에 딸린 담장은 보물 지정되어 있으며, 서원 전면에 위치한 신도비, 은행나무 등을 포함한 서원 전역을 국가지정문화유산(사적)으로 지정하여 보존·관리하고 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달성 도동서원(김굉필 배향)과는 이름만 같을 뿐, 경산의 도동서원은 신라시대 대학자이자 원효의 아들인 설총(薛聰)을 제향하고 기리기 위해 세워진 뜻깊은 곳입니다.

<세계유산등재: 한국의 서원> (2019. 7. 6.)
-.유산지역 : 소수서원(영주), 남계서원(함양), 옥산서원(경주), 도산서원(안동), 필암서원(장성), 도동서원(달성), 병산서원(안동), 무성서원(정읍), 돈암서원(논산)
- 성리학과 관련된 한국의 문화적 전통의 탁월한 증거로 그 교육과 사회적 관습은 많은 부분 오늘날까지 지속 됨. 서 원은 중국에서 들어온 성리학이 한국의 여건에 맞게 변형되고 있고 그 결과 그 기능과 배치, 건축적인 면에서 변화를 겪고 토착화되는 역사적 과정에 대한 특출한 증거임.

No 83.☞. 언제? 어디를? = 2026.06.21. ☞. 언제? 어디를? = 2026.06.21. 경산시 자인면 계정길 80에 위치한 자인계정숲(慈仁桂亭林)은(는) 이곳 사람들이 ‘개장지 숲’이라 불러왔고 계림(桂林)으로 기록하기도 했다. 1650년경의 문헌에 계정서록(桂亭西麓)이란 기록이 있고, 또 금석문에도 계정록으로 기록된 것이 있어서 이것을 바탕으로 해서 계정숲이란 명칭이 주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민족항일기에는 자인면사무소의 서쪽에 있다 하여 서림(西林)으로 개칭한 적도 있다.
민족항일기에 군함의 갑판용이라 해서 많은 굵은 나무들이 벌채되었다고도 한다. 그런데도 지금 큰 나무들이 우거져 있고 일대에는 속칭 ‘말무덤’이라 부르는 고분이 산재해 있다.

No 83.☞. 언제? 어디를? = 2026.06.21. 경산시 자인면 계정길 80에 위치한 자인계정숲(慈仁桂亭林)에는 누이와 함께 여원무를 추면서 왜구를 물리친 한장군의 묘라고 이곳 사람들이 믿고 있는 고총도 있다. 자인농업고등학교 운동장 정리작업 때 한 개의 고분이 헐리고 토기와 인골이 나왔는데 사람들은 그것이 한장군의 유골이라 하여 계정숲 안으로 이장하고 비를 세웠다.

자인계정숲 (경상북도 자연유산/천연기념물)에 위치한 사중당(使衆堂)은 1763년(영조 39년) 당시 자인 현감이던 정충언이 건립한 건물입니다. 어귀에는 당나무가 서 있으며 오월 단오 전후의 계절에는 버들가지를 꽂은 금줄이 쳐진다. 숲 전체가 제사마당이 되는 것이다. 계정숲의 진충묘(盡忠廟)는 한장군이 죽은 뒤에 사람들이 세운 것이며 정충언 현감이 중수한 바 있다. 애초에 한장군 신위를 모신 사당이었으나 일제 때 철거되고 그 자리에 그들이 신사를 세웠다.
광복 후 ‘한장군놀이(호장굿, 여원무)’가 복원되면서 북사리에 있던 한당(韓堂)을 이건하여 현재의 진충묘가 되었다. 이 숲은 한장군을 모시는 성지이며 자인 단오굿의 굿판으로서 향토사적 의미가 큰 곳이다. 이곳 숲은 생물학적·역사적·민속적으로 높은 가치를 담고 있다.

No 84.☞. 언제? 어디를? = 2026.06.21. 경산시 자인면 교촌길9길 14에 위치한 자인향교(慈仁鄕校)은(는) 고려 공민왕 때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창건되었다. 1562년(명종 17) 부윤 이정(李楨)이 중건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으며, 1615년(광해군 7)도천산(到天山) 아래에 이전하였다가 1728년(영조 4)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다.

자인향교(慈仁鄕校)은 1900년과 1922년에 각각 대성전(大成殿)을 중수하였고, 1924년에 명륜당(明倫當), 1926년에 대성전(大成殿)을 중수하였다. 현존건물로는 6칸의 대성전, 8칸의 명륜당, 5칸의 모성루(慕聖樓), 4칸의 동재(東齋), 평삼문(平三門), 4칸의 하당(下堂),2칸의 제기고(祭器庫) 등이 있다. 건축형태는 명륜당이 있고 그 뒤쪽에 대성전이 있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태이다. 남향한 경사면에 3단으로 층을 이루어 아래부터 외삼문, 명륜당, 대성전으로 배치되었고, 대성전 왼쪽에는 서무, 뒤쪽에는 화계가 있다.

자인향교(慈仁鄕校) 대성전(大成殿)에는 5성(五聖), 송조4현(宋朝四賢), 우리 나라 18현(十八賢)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전적 · 노비 등을 지급 받아 교관 1명이 정원 30명의 교생을 가르쳤으나, 조선 후기 이래 향교는 교육 기능이 쇠퇴하고 대신 선현에 대한 제향을 통한 교화 기능을 주로 담당하였다. 봄 · 가을에 석전(釋奠)을 봉행(奉行)하며 초하루 · 보름에 분향하고 있다.

자인향교(慈仁鄕校)은 1985년에 경상북도 문화재자료(현,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되어 있으며, 운영은 전교(典校) 1명과 장의(掌議) 수명이 담당하고 있다.

No 85.☞. 언제? 어디를? = 2026.06.21. 경산시 자인면 원당길 12길 24에 위치한 용계서원(龍溪書院)은(는) 임진왜란 당시 자인지방에서 활약한 의병장 성재(省齋) 최문병(崔文炳)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진 곳입니다.
용계서원(龍溪書院)은(는) 1700년(숙종 26)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최문병(崔文炳)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의사(倡議祠)를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712년에 용계서원으로 변경하여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왔다.

용계서원(龍溪書院)은(는)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14년 사림의 공의로 복원하였다.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묘우(廟宇), 신문(神門), 6칸의 강당, 1칸의 전사청(典祀廳), 각 3칸의 동재(東齋)와 서재(西齋), 정문(正門), 6칸의 주사(厨舍) 등이 있다.
묘우인 선현사(先賢祠)에는 최문병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강당은 경재당(敬齋堂)이라 현액 되어 있으며, 동편의 협실은 헌관실로 사용되고 마루는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등의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동재는 재석 및 유사실로, 서재는 제원 및 유생들이 기거하면서 공부하는 장소로, 전사청은 향례 때에 제수를 장만하여 보관하는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주사는 서원을 관리하는 고자(庫子)가 사용하고 있다.
이 서원에서는 매년 3월 중정(中丁 : 두번째 丁日)에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제품은 4변(籩) 4두(豆)이다.

No 86.☞. 언제? 어디를? = 2026.06.21. 경산시 진량읍 진성로 77에 위치한 도천서원(道川書院)은(는) 1946년에 건립된 경주 이씨 문중의 서원입니다. 경주 이씨의 시조인 표암공(瓢巖公) 이알평을 비롯해 이제현, 이천 등의 선현을 제향하고 추모하기 위해 세워졌습니다.
이천은 고려 후기의 문신으로 1299년(충렬왕 25)에 국자감시(國子監試)에 급제하여 첨의평리상의(僉議評理商議),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 등을 역임하고 월성군(月城君)에 봉해졌다. 이제현은 고려 후기의 문신으로 고려 건국 초의 삼한공신(三韓功臣) 이금서(李金書)의 후손이다. 1301년(충렬왕 27) 국자감시에 1등으로 합격하고 삼사판관(三司判官), 서해도안렴사(西海道按廉使),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문하시중(門下侍中) 등을 역임하였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이항복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도천서원에 함께 배향된 이제현의 방손이다. 1580년(선조 13) 알성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병조판서, 이조판서, 홍문관과 예문관대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도천서원(道川書院) 건물로는 외삼문인 건인문(建仁門), 강당, 내삼문인 개원문(開元門), 사당인 경덕사(景德祠)가 있다. 건인문을 들어서면 마당을 사이에 두고 강당이 동남향으로 자리 잡고 있으며 강당에는 ‘도천서원(道天書院)’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강당의 우측에는 경덕사가 배치되어 있다. 강당은 정면 6칸, 측면 3칸 규모의 팔작 기와집이다. 가운데 4칸을 대청으로 꾸미고 대청의 좌우에 온돌방 1칸씩을 둔 중당협실형(中堂挾室形)이다. 전면에는 반 칸 규모의 툇칸을 두었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맞배 기와집이다. 사괴석으로 두벌대 쌓기를 한 기단(基壇) 위에 다듬돌 주초(柱礎)를 놓고 기둥을 세웠는데, 기둥은 모두 원주(圓柱)를 사용하였다. 겹처마의 이익공(二翼工)집이며, 지붕의 양측 면에는 비바람이 치지 않도록 풍판(風板)을 설치하였다.

No 87.☞. 언제? 어디를? = 2026.06.21. 경산시 향교길 14-19에 위치한 경산향교(慶山鄕校)은(는) 조선시대에 지방민의 교육과 유학자들의 제사를 위해 세워진 공립 교육기관입니다. 원래 고려 공민왕 2년(1390년) 옥곡동에 처음 세워졌으나 임진왜란 때 불탄 후 여러 차례 자리를 옮겼고, 현재는 중방동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향교는 공자와 여러 성현께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나라에서 세운 교육기관이다.
경산향교(慶山鄕校) 제사 공간인 대성전(大成殿)을 앞에 두고 교육 공간인 명륜당을 뒤쪽에 둔 전묘후학의 배치 형태를 따르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토지와 노비·책 등을 지원받아 학생을 가르쳤으나, 지금은 교육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 기능만 남아 있다.

경산향교(慶山鄕校) 1390년에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配享)하고, 지방의 중등교육과 지방민의 교화를 위해서 창건되었다.
1550년에는 현령 박세린(朴世麟)이 중수하였고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33년에 현령 박창(朴敞)이 중수하였으며, 1681년에 현령 홍처공(洪處恭)이 감사 이수언(李秀彦)에게 건의하여 교궁(校宮)을 현 위치로 이건하였다.
경산향교(慶山鄕校) 1702년에는 현령 이발(李渤)과 교임 유포(柳浦)가 보수하였고, 1715년에 현령 심용준(沈龍浚)과 교임 조동기(趙東箕) · 한두산(韓斗山) · 나학해(羅學海)가, 1721년에는 현령 이정량(李廷亮)이, 1725년에는 현령 윤해(尹楷)가 각각 보수하였다.
1753년 현령 김정겸(金貞謙)과 교임 서도벽(徐道璧) · 정두빈(鄭斗彬)이 명륜당을 보수하였고, 1803년에는 현령 이지순(李志淳)과 교임 손홍점(孫弘漸)이, 1808년에는 현령 박종서(朴宗恕)와 교임 이경(李璟)이, 1837년에는 현령 성재호(成載護)와 교임 정진방(鄭鎭邦) · 장용복(蔣容復)이, 1850년에는 현령 강의영(姜義永)이 각각 대성전을 중수하였다.

경산향교(慶山鄕校) 1862년에는 기와를 보수하였고, 1911년경산공립보통학교(慶山公立普通學校)를 설립할 때 부지의 일부를 학교에 제공함에 따라 명륜당과 동서재를 해체하였다. 1919년 대성전 서편에 모성당(慕聖堂)을 신축하였다가 1946년 다시 동편으로 이건하였으며, 현재에는 이 건물을 명륜당으로 사용하고 있다.
경산향교(慶山鄕校) 현존하는 건물은 박공지붕 겹처마인 5칸의 대성전과 5칸의 명륜당, 삼문 · 중문과 최근에 새로 지은 4칸의 모성당 등이 있다. 대성전에는 5성(五聖) · 송조4현(宋朝四賢), 우리나라 18현(十八賢)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경산향교(慶山鄕校)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전답과 노비 · 전적 등을 지급받아 교관이 교생을 가르쳤으나, 현재는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 · 가을에 석전(釋奠: 공자에게 지내는 제사)을 봉행하고 초하루 · 보름에 분향을 올리고 있으며, 전교 1명과 장의(掌議) 수명이 운영을 담당하고 있다.
경산향교(慶山鄕校)는 본래 경산시 신교동에 있었으나 1997년 9월 경산시 향교길 14-19(중방동 760)로 이전했으며, 이 향교의 대성전과 삼문은 2013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No 88.☞. 언제? 어디를? = 2026.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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