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여! 백 고무신
▶.괴산 (주치봉,구왕봉,희양산,시루봉).2019/08/24 본문
은티마을-은티재-주치봉-구왕봉-희양산-시루봉
언제 | 2019/08/24 | 어디를(주봉/높이) | 괴산 (주치봉,구왕봉,희양산,시루봉) | ||||||
산행 들머리는 | 은티마을 (충북 괴산군 연풍면 주진리 514-5) | ||||||||
특징볼거리는 | ⬔.은티마을은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은티는 여궁혈에 자리하고 있어 동구에 남근을 상징하는 물체를 세워야 마을이 번창하고 주민들이 아들을 많이 낳을 수 있다고 하여 동구 송림안에 남근석을 세워놓고 매년 음력 정월 초 이튼 날을 정제일로 마을의 평안과 동민 가족 모두의 안녕을 기원하는 소지를 올리며 제가 끝나고 나면 한자리에 모여 음복을 하고 제물을 나눠 먹는 등 고사를 지내고 있다. ⬔.구왕봉(879m)의 유래는 봉암사의 창건설화에 기인한다. 구왕봉 남쪽에는 봉암사가 자리 잡고 있는데, 879년(신라 헌강왕 5) 지증대사가 큰 못의 용을 구룡봉으로 쫓아낸 뒤 못을 메워 봉암사를 세웠다고 하고 지금의 구왕봉이라는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또한 봉암사에서는 날개봉이라고도 한다. 이 날개봉에 매년 소금단지를 묻어 기를 눌러 둔다고 한다. ⬔.희양산(曦陽山, 996m)은 경북 문경시 가은읍과 충북 괴산군 연풍면의 경계를 이루는 희양산은 문경새재에서 속리산 쪽으로 흐르는 백두대간의 줄기에 우뚝 솟은 암봉이다. 희양산은 산 전체가 하나의 바위처럼 보이는 데다 바위 낭떠러지들이 있어 주변의 산뿐만 아니라 먼 산에서도 쉽게 알아볼 수 있는 산이다. 정상에서의 조망은 호쾌하고 아름답다. 가은 봉암사가 자리한 봉암 용곡 너머로는 대야산, 속리산 줄기가 날카롭게 솟아 있다. 산의 남쪽 자락에 자리 잡고 있는 봉암사는 신라 헌강왕5년(879년)에 지증대사가 창건했다 하며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였다고 한다. 봉암사를 창건한 신라 헌강왕 때의 고승 지증대사는 전국 명산을 둘러본 뒤 이곳에 와 『산은 사방에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으니 마치 봉황의 날개가 구름을 치며 올라가는 듯하고 계곡 물은 백 겹으로 띠처럼 되었으니 용의 허리가 돌에 엎드려 있는 듯하다』고 지세를 평하기도 했다고 한다. | ||||||||
누구하고 | 아내(wife)하고 단 둘이서~ | 난이도 | 上++ | ||||||
산행 길잡이 | 은티마을에 도착(08;40) 은티재를 향해서 출발합니다. 은티재를 거쳐 주치봉에 도달합니다. 주치봉에서는 리본이 많이 달린 곳(길 주의)으로 완전 내려 가야 구왕봉에 도달합니다. 구왕봉까지는 특별한 굴곡 없이 도달하지만 구왕봉을 하산하는 길은 워메 로프에 급경사에 한 없이 내려갑니다. 그리고 희양산을 향해 급경사를 오르다가 약 300m를 남겨 두고 진짜 급경사의 로프구간(초보위험)을 만납니다. 간신히 오르면 희양산, 여기서부터 시루봉까지는 무난히 지납니다. 시루봉에 정상에서 하산하는 길은 두 가지로 뒤로 후퇴해서 가는(원만한 길)길 과 정상에서 급경사(계곡물에 등로 희미함)로 가야 합니다. | ||||||||
이동코스/거리 | 은티마을-(2.3Km)은티재-주치봉-(2.4Km)구왕봉-(2.0Km)희양산-(1.9Km)시루봉-(2.9Km)은티마을 (총11.5) Km | 자체평점 | ●●●◐○ |
은티마을-주치봉-구왕봉-희양산-시루봉 정상까지
은티산장
(上) 좌측 임도를 (上 下) 마을 길로 들어섭니다.
(上) 갈림길에서 우측으로 석축에서 다시 우측 방향으로 들어섭니다.
도중에 만난 나무에 매달린 첨본 벌집입니다.
이내 곧 은티재에 도착합니다.
은티재까지는 무난히 도착하고
구왕봉 방향으로 진입합니다.
역시나 봉암사에서 표시 해 놓은 문경 봉암사 방향은 출입금지 한다는 표시
(참고로 봉암사와 관련하여 구산선문과 봉암사 결사에 대한 글을 적어본다. 구산선문(九山禪門)이란 선종(禪宗)이 중국으로부터 유입된 후 신라 말 고려 초에 형성된 9개의 산문(山門:문파)을 말하는 것으로 선종은 석가가 영산(靈山) 설법에서 말없이 꽃을 들자, 제자인 가섭(迦葉)만이 그 뜻을 알았다는 데서 기원하며,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기 때문에 불심종(佛心宗)이라고도 한다. 중국에서는 달마대사 (達磨大師)가 전한 뒤 혜능(慧能)·신수(神秀) 등에 의해 선양되었다. 우리 나라의 경우는 9세기 초에 이르러서야 크게 대두되었다.
선종은 불립문자(不立文字)를 주장하여, 경전에 의하지 않고 자기 내에 존재하는 불성(佛性)을 깨치고자 한 것이었다. 그러기 위하여 밖으로부터의 모든 인연을 끊고〔外息諸緣〕, 깊숙한 산간에 파묻혀 수행하는, 이른바 좌선을 행하였다. 절대적인 불타(佛陀)에 귀의하려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가진 불성의 개발을 중요시하였다.
실상산문 (實相山門) 신라 흥덕왕 때 홍척 국사가 지금의 전라북도 남원시 산내면 입석리에 실상사를 세우고 개산(開山)하였다. 구산 가운데 가장 먼저 세워졌다.
가지산문 [迦智山門] 도의 국사가 전라남도 장흥군 가지산 보림사에 개산하였다.
사굴산문 [闍堀山門] 문성왕 때에 범일 국사가 강원도 강릉시 구정면 학산리에 굴산사를 세우고 개산(開山)하였다.
동리산문 [桐裏山門] 혜철(惠哲)이 전라남도 곡성 태안사에서 개산하였다.
성주산문 [聖住山門] 문성왕 7년에 무염 선사(禪師)가 충청남도 보령시 미산면 성주리에 성주사를 세우고 개산(開山)하였다.
사자산문 [獅子山門] 문성왕 9년에 도윤이 강원도 영월군에 개산(開山)하였다.
희양산문 [曦陽山門] 헌강왕 때 도현이 경상북도 문경시에 개산하였다.
봉림산문 [鳳林山門] 현욱(玄昱)이 경남 창원에 개산하였다.
수미산문 [須彌山門] 고려 태조 15년(932)에 이엄(利嚴)이 황해도 해주에 광조사(廣照寺)를 세우고 개산하였다.
‘봉암사 결사’는 1947년 신라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문경 희양산 봉암사에서 전 종정 성철스님 등 몇몇 스님들이 시작한 수행결사로, 당시 조선의 억불정책과 일제의 식민지 정책으로 불법이 쇄락하고 근본정신이 퇴색했던 한국불교를 바로 세우고자 일으킨 획기적 불사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봉암사 결사정신은 이후 승단 정화운동과 조계종단 재건으로 계승되어 현재의 조계종 종지종풍 정립의 중요한 계기가 됐다.
결사의 선구자는 청담, 성철, 자운, 우봉 스님 등 네 명. 이후 결사 정신에 공감한 눈 푸른 납자들이 줄줄이 그 뒤를 따라 입산했다. 현재까지 파악된 인원은 모두 42명. 혜암, 월산, 성수, 법전, 지관, 보일, 의현 등 비구 26명과 산내 백련암에서 정진한 비구니 16명이 그들이다.
이들 수좌는 이곳에서 조선과 일제 시대를 거치는 동안 만신창이가 돼버린 한국불교를 바로잡고자 결사를 단행했다. 공동수행의 기본방침은 '부처님 법대로'. '훼불 시대'를 통과하면서 부처님 법에서 멀어진 불교계의 폐습을 혁신코자 한 것이다.
당시 봉암사 스님들은 '공주규약(共住規約)'을 만들어 생활의 지표로 삼았다. 이 열여섯 가지 청규에는 스님들이 손수 농사를 짓고 밥을 해먹는 '일일부작 일일불식(一日不作 一日不食)' 등이 포함돼 스스로 결사수행하겠다는 의지를 굳게 다졌다.
자급자족 외에 '대처'의 타락한 승풍을 쇄신할 것도 천명해 부처의 교법에 따른 수행정신을 되찾겠다는 각오를 새롭게 했다. 당시 한복 두루마기의 승복을 지금처럼 보조장삼과 괴색 오조가사로 바꾼 것도 그때. 다시 말해 현재 우리가 아는 승복은 바로 봉암사에서 나왔다는 얘기다.
봉암사 결사는 한국불교의 큰집인 조계종의 종지종풍 정립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더불어 발우 공양, 금강경ㆍ반야심경 독송의식 등 지금의 생활ㆍ의례도 바로 이 결사에서 유래한다. 조계종단의 가까운 뿌리가 봉암사에 있다는 얘기다.
봉암사 결사의 기간은 짧았다. 빨치산이 남북을 오르내리는 통로에 희양산이 위치해 1949년 초부터 좌우 대립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 것. 그러자 이듬해 3월 상당수의 스님들이 경남 고성의 문수암으로 수행처를 옮겼고, 한국전쟁이 터지면서는 대중 스님들이 모두 해산하면서 결사가 완전 중단됐다. 하지만 봉암사 결사가 한국불교사에 남긴 발자취와 의미는 매우 크다. 조계종의 역대 종정 중 4명, 총무원장 중 7명이 봉암사 결사 스님이었다는 사실은 이를 잘 함축해준다.
이처럼 봉암사가 천금의 무게를 지니는 데는 결사가 말해주는 불교 개혁의 상징성이 있다. 조계종단은 1982년 봉암사를 종립특별선원으로 지정하면서 불조정법 수호의 청정수행도량으로 자리잡게 했다. 종단 소속 2천500여 개의 사찰 가운데 일반인은 물론 불자들의 출입마저 25년째 제한되는 유일한 곳이 바로 봉암사. 일 년 중 외부인의 출입이 허용되는 날은 부처님오신날이다.
주치봉까지도 무리 없이 도착합니다.
주치봉에서 리본이 많이 달린 우측으로 가야 희양산-구왕봉입니다.
완전 내려서야 하네요.ㅜㅜ
멀리 보이는 구왕봉
내려서고 오름을 해서야 구왕봉에 도달합니다.
별 조망은 없지만 오르는 구간에서는 조망이 뛰어 난 곳이 많습니다.
지금까지는 즐거운 표정 ㅎㅎ
폼도 잡아보고
웃음도 지어 봅니다.
대 암릉으로 만들어진 희양산
요때까지만 해도 희양산 오르는 구간을 모르는 듯.ㅎㅎ
흐~미 급경사에 로프까지
또 급경사를 완전 내려서야 합니다.
지름재에 도착
도중에 요상한 바위도 보고
드뎌 희양산을 오르는 젤로 빡센 구간에 들어섭니다.
기가 찰 노릇입니다. 그냥 급경사가 아닌 완전 섯네요.ㅜㅜ
초보자는 특히 조심해야하는 구간입니다.
간신히 매달린 로프를 부여 잡고 약 500m 급경사 구간을 올라야 합니다.
마지막 안간힘을 써 봅니다. 괴산에 있는 산을 오를때마다 느끼는 생각, 타 지역에 비해 좋은 산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이정표에 등산로 정비가 후퇴하는 느낌이네요. ㅜㅜㅜ
대릉에 홈이 (누가 팠지? ㅎㅎ)
드뎌 희양산 정상에 도착합니다.
힘 겹게 오른 산이니 만큼 기쁨도 두배
뒤 돌아본 구왕봉
다시 시루봉으로 이동합니다.
시루봉으로 가는 도중에 만난 성곽 터 (▲ 희양산성(曦陽山城) : 백두대간 희양산과 시루봉 사이 안부(鞍部), 문경시 가은읍 원북 안성골 위에 쌓은 신라의 고성(古城)으로 높이 1~3m, 폭 4m, 길이 150여 m가 현재까지 남아있다. 성곽외벽이 괴산군 연풍면 중리 은티마을쪽을 향하고 있고, 안부의 성곽에 지금도 은티마을로 내려가는 갈림길이 있다. )
언제 축조되었는지는 몰라도 아직 건재하네요.
도중에 만난 싸리버섯, 확실히 몰라서 그냥 왔네요.,ㅜㅜ
마지막 시루봉에 도착합니다.
시루봉 정상에서 은티마을로 가는 길은 이정표가 없습니다.
뒤 돌아서 가는길과 정상에서 바로 가는 길
정상에서 바로 가는 길을 택합니다. 뒤 돌아 가는 길과 만나는 삼거리
(정상-삼거리 1.5Km, 뒤 돌아 삼거리 오는 길 2.1Km)
좌측 차량 방향으로 내려섭니다.
영혼이 없습니다.ㅜ
하지만 무사히 도착해서 귀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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