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고무신 부부

대구 팔공산 올레길 4코스_평광동 왕건길_2022.12.23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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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팔공산 올레길 4코스_평광동 왕건길_2022.12.23

백고무신 부부 2022. 12. 23. 17:01

. 언제 : 2022/12/23

. 어디를(주봉/높이/행선지) : 대구 팔공산 올레길 4코스__

. 들머리는? : 대구 동구 평광동 1498-3 (평광동 강순항나무)

. 특징,볼거리는? : 효자 강순항나무, 강순항 정려각, 와룡정, 첨백당, 광복소나무, 은행나무(보호수), 모영재(신숭겸장군), ”

. 누구하고 : 와이퍼하고 둘이서 ~

. 난이도 는? : --

. 길잡이 : 대구 팔공산 올레길 4코스를 추운 날씨 속에서 출발, 평광동 효자 강순항 나무 삼거리에 도착해서 한컷하려는데 추워서 번개같이 사진 만 찍고 다시 이동, 다시 효자 강순항 정려각 앞에서 귀경을 하고 첨백당으로 옮겨봅니다. 와룡정을 지나 광복 소나무가 멋들어지게 자리잡고 있고 보호수(은행나무) 뒤로 첨백당이 보입니다. 역사 공부를 마치고 모영재(신숭겸장군)를 마지막으로 오늘의 여정을 마무리하고 원점 회귀합니다.

. 이동코스/거리는? : 효자 강순항(평광동)-효자 강순항 정려각-와룡정-첨백당광복소나무-모영재-원점회귀 (총 이동거리 계 7.26km),

. 자체평점은 : ●●◐○○

팔공산 올레길 4코스로갑니다.  동구 평광동은 단양우씨의 집성촌으로 대구 사과의 명백을 이어 오고 있는 곳이다. 평광동은 "사랑이" 마을이라고도 불리는데, 왕건과 관련된 일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927년 지묘동 일대에서 벌어졌던 공산전투에서 수세에 몰린 왕건은 불로동과 도동을 거쳐 평광동까지 이르게 되는데. 마을 어귀에서 나무꾼을 만나 주먹밥을 얻어 먹고 힘을 내어 도피한다.   왕건이란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나무꾼은 그를 찾아 이곳저곳 누볐으나 결국 찾지 못했고, 그 부근에서 왕을 잃어버렸다, 해서 실왕리(失王里)라 부르다가  세월이 지나면서 사량이. 사랑이 동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무지하게 추운 날씨속에 평광동(대구시 동구 평광동은 사과 농사를 짓는 140여 호 농가가 모여있는 마을이다.  한때는 ‘대구하면 능금’이라는 말이 있을 만큼이나 사과로 유명한 지역인 대구는 이제 평광동에서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평광동은 팔공산 자락에 자리를 잡아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기온차가 심한 마을이다.  100년 넘게 사과를 재배해 온 지역으로, 이곳에서 생산되는 사과는 “평광 꿀사과”로 불릴 정도다.) 효자 강순항 나무(평광동) 삼거리에 도착합니다.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 35호1835년(현종1년) 11월에 건립한 것으로, 강순항의 자는 태겸, 호는 가온으로 1745년(영조 21년)에 태어나 순조 30년에 죽었는데, 어릴때부터 부모에 대한 효행이 지극하였다.  이에 조정에서 그가 죽은 해의 1830년(순조 30년) 정려를 내리고, 숭정대부행동지중추부사를 증직하였다.
평광동정류장.
단양 우씨 평광 유허비 外 (4거리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첨백당 0.3km, 왼쪽으로 꺾어 올라가면 평광지(모영재) 0.6km, 평광지와 첨백당 사이의 중간길로 직진하면 당남리 1.6km, 도동 측백나무숲까지는 3.5km)

 

와룡정(경희정/향향문)-조선후기의 정자로 단양우씨의 선조인 용재공 우영재를 봉향하기 위하여 고종16년(1879년)에 건립하였다.  원래의 위치는 산건너 깊은 골짜기에 있었지만 너무 후진다는 후대들의 말에 따라 1966년 이전하였다고 하며 와룡정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동네 어귀 냇가에 와룡지처가 있다하여 불리어진다고 한다.
대문 오른쪽에는 경희정(景喜亭)을 안내하고 있다. 경희정 재실은 단양 우씨 평광동 세거조(世居祖)인 우익신(遇翊臣)의 10세 손인 만희재 영석, 11세 손인 단봉 규환.12세 손인 운제 효봉을 위하여 삼대의 추원정(追遠亭)으로 후손들이 1970년에 건립한 것이다.
광복소나무의 유래로는 1910년 8월 29일 일본이 우리의 주권과 영토를 강탈한 후, 근 35년 동안 우리민족은 이루 말 할 수 없는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1945년 8월 15일, 나라를 되찾은 날, 단양우씨 첨백당 문중에서 우하정 선생 주관으로 문중원들과 뜻을 모아 광복의 기쁨을 기리고, 망국의 원한을 잊지 않고자 기념식수를 하기로 하고 백발산에 가서 소나무 세 그루를 옮겨와 첨백당 앞에 심고, 옆에 기념 표지석을 세웠다.고 한다.
첨백당(瞻栢堂:첨백당이라는 이름은 우명식 선생의 묘소가 있는 ‘백밭골을 우러러보는 집’이라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다.)은 대구광역시 동구 평광동에 있는 조선시대의 건축물로 1984년 7월 25일 대구광역시의 문화재자료 제13호로 지정되었다.
신숭겸장군 모영재로 가는 멋드러진 소나무(숲)길

 

모영재(慕影齋) ; 평산신씨 시조 고려태사 장절공 신숭겸 장군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모영재(慕影齋)-모영재는 평산신씨 장절공 신숭겸장군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영정각으로 고려시대때 지묘사를 지워 영정을 모시고 명복을 비는 불공을 드리도록 했다.  좌로는 "영모당(永慕堂)"이 자리하고,  정면 충절문(忠節門) 앞에는 "영모재 성역화 사업 기념비"가 세워져 있고,  충절문 안쪽에 방3칸, 대청1칸 건물로 홑처마 맞배 지붕 형태의 모영재(慕影齋)가 자리잡고 있다.  대구시 동구 평광동 108번지에 소재한 모영재(慕影齋)는 1931년 고려 개국공신인 장절공 신숭겸의 유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것인데 매년 음 9월 9일에는 신씨문중에서 합동으로 향사를 지내오고 있다.  1866년 중수한 기록이 남아 있으며, 2019년도에 성역화 사업을 하였다.
고려말에 지묘사가 폐사되어 조정에서 다시 실왕리 뒷산에 대비사를 세우고 사전지를 하사와 거승으로 하여금 존봉케 하였으며 순조19년(1819년) 대구 영리 김철득이가 투장흉게로 소실된 그 자리에 선대묘 3기를 무단설치한 최심의 고변을 알게되어 1829년 대비사 옛터 앞에 영각 유허비를 세웠다.고 한다.
모영재 뒤에는 순조 32년(1832) 후손 신정위가 신숭겸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영각 유허비가 있다.
신숭겸장군 유허비(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