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 이모저모/역사의 발 자취

♨.구미-왕산허위선생 기념관, 생가터_2026.06.23

백고무신 부부 2026. 6. 23. 19:34

☞. 언제? : 2026/06/23일
☞. 어디를?(주봉/높이/목적지) : ♨.구미-왕산허위선생 기념관, 생가터_2026.06.23
☞. 들머리는? : 구미시 임은동 266 (기념관 주차장)
☞. 특징,볼거리는? : “왕산허위선생 기념관, 생가터, 기념공원”
☞. 누구하고? : 와이퍼하고 둘이 서~
☞. 난이도는? : 왕산허위선생 기념관-왕산허위선생 묘-왕산허위선생 생가터(기념공원)-원점회귀 (이동거리 왕복 약 km)
☞. 자체평점은 : ●●◐○○

왕산허위선생기념관은 지하1층, 지상2층으로 구성되어 있고 전시실과 시청각실, 어린이 도서관, 등 첨단 시설물이 들어서 있습니다.  기념관 주변에는 왕산허위선생 줄소루, 묘지가 조성되어 있고 인근에 기념공원(생가터)가 조성되어 있습니다.  선생의 일대기를 새긴 왕산의 벽, 높이 3미터의 동상, 인물상, 부조관, 추모관 등 조형물과 잔디광장 등 휴게시설은 방문객들의 역사의 재미 있는 관람을 도와줍니다. 

1854년 경북 구미에서 출생하여 영희정 참봉(중앙 관서와 왕릉을 관리하던 종9품의 최하위 관직으로, 현대의 5급 공채(행정고시), 평리원 재판장(고종 때 설치된 근대적 사법기관(현재의 대법원 격)으로, 재판장(원장)은 사법권을 총괄하는 자리)을 거쳐, 의정부 참판(의정부가 아닌 국가의 행정 실무를 맡아보는 6조(이조, 호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의 차관급(종2품) 관직명), 비서원승(왕명의 출납과 행정 사무를 관장하던 국왕 직속의 핵심 비서관(오늘날의 대통령비서실) 등의 관직을 지냈으나,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1907년 고종황제의 강제 퇴위와 군대 해산에 통분하여 경기도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1907년 11월 경기도 양주에서 이인영, 신돌석, 이강년, 문태서, 민긍호 의병장과 함께 전국연합 의병부대인 “13도 창의군”을 조직하였고, 군사장 겸 진동창의대장(경기·황해도)으로 선발대 300여명을 이끌고 일제 통감부를 공격하려는 서울진공작전을 펼쳤으나, 후속부대와의 연결 미비와 무기의 열세 등으로 결국 실패하였다.  선생은 1908년 5월 일본 헌병대의 습격을 받아 체포되었으며, 그해 10월 21일(음력 9월 27일) 서대문형무소에서 51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으며, 선생의 출생지인 구미에 『왕산 허위선생 기념관』을 건립하였다.

[기념관 좌측 유허비와 묘역으로 오르는 전경]
儒門(유문)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작은아버지 海樵公(해초공)과 맏형 舫山公(방산공) 허훈의 가르침을 받았다.허훈은 星湖(성호) 李瀷(이익)의 학문을 이은 학자였다.허위 형제는 1895년 민비의 시해와 단발령 소식을 듣고 각각 의병에 가담했다.

[旺山許蔿先生遺墟碑(왕산 허위 선생 유허비)]

왕산허위선생 기념관 줄소루(崒昭樓)는, 선생의 학덕과 공훈이 영원히 빛날 것임을 기리기 위해 한국국학진흥원장이 제액(현판 글씨를 씀) 하였습니다.

1975년 건립한 왕산 선생의 유허비는 2009년 8월 구미 금오산에서 구미 임은동 기념관 옆으로 이건 했다고합니다.

父葬未成(부장미성, 아버지의 장례를 아직 마치지 못했고)
國權未復(국권미복, 국권도 되찾지 못했으니)
不忠不孝(불충불효, 충성도 못했고 효도도 못하였으니)
死何暝目(사하명목, 죽은들 어찌 눈을 감겠는가)

기념관을 관람하고 기념공원(생가터)으로 이동 해 봅니다.

13도 창의군 총대장으로 서울 진공 작전을 이끈 독립운동가 왕산 허위 선생의 애국정신을 기리는 역사 교육 장소로, 생가 터 일대에 기념관과 공원이 함께 조성되어 있습니다.

생가터 및 기념공원: 선생이 유년 시절을 보낸 생가 터(임은동 266번지 일대)에 조성된 공원으로, 높이 3m의 선생 동상, '왕산의 벽', 인물상, 추모관 등이 마련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