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 이모저모/향교, 서원, 서당, 재실 탐방_

☞. 향교(鄕校), 서원(誓願), 서당(書當), 재실(齋室), 누정(樓亭) 탐방 ⑦

백고무신 부부 2026. 6. 28. 11:16

☞. 향교(鄕校), 서원(誓願), 서당(書當), 재실(齋室), 누정(樓亭) 탐방 어디까지 가 봤나요? ①~②~③~④~⑤~⑥에 이어 탐방은 계속 이어집니다.

⑦.(No 91~105) : 신숭겸태왕전, 모영재, 동호서당, 고산서당, 구계서당, 화산서당, 이우당, 덕양서원, 낙빈서원, 소계정, 사양정사, 모선당/창포재, 송계당/물소재, 경주이씨 영사재, 봉무정, 

No 91. ☞. 언제? 어디를? = 2026.06.27. 문경시 가은읍 완장리 일원에 위치한 신숭겸태왕전(申崇謙太王殿)(는)은 평산(平山)신(申)씨 시조인 신숭겸 장군의 사당인 태왕전(太王殿)이 있으며 문경에 소재하는 정자 중 규모가 가장 크고 오래된 영류정(映流亭)과 재사 존승재(尊承齋)가 있다.   '신숭겸태왕전(申崇謙太王殿)'은 고려 시대 개국공신이자 평산 신씨의 시조인 신숭겸(申崇謙) 장군의 위패와 영정을 모신 사당입니다. 문경 지역에 있는 정자 및 서원 건축물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합니다.

☎.고려 초기의 장군이자 개국공신. 평산 신씨의 시조(始祖).초명 능산(能山). 시호 장절(壯節).
《고려사》에는 강원도 광해주(光海州:春川) 사람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전라도 곡성현(谷城縣)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다.  태봉의 기장(騎將)으로 활약하였고 많은 공을 세워 마군장군의 지위에 있었다가, 918년 배현경·홍유·복지겸 등과 협력, 태봉의 국왕 궁예를 폐하고 왕건을 추대하여 고려 개국의 대업을 이루었다.  왕건을 도와 고려를 건국한 공으로 1등 개국공신이 되며, 아마도 이 즈음 왕건에게서 신(申)씨를 사성 받고 숭겸(崇謙)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927년(태조 10) 9월 공산(公山)에서 견훤의 군대에게 태조가 포위 되자 김락 등과 함께 역전하여 이를 구출하고 전사하였다.  1120년(예종 15) 예종은 그와 김락을 추도하여 《도이장가》라는 향가를 지었다. 삼중대광(三重大匡)에 태사(太師)로 추증되었으며, 태조의 묘정(廟廷)에 배향되고 곡성(谷城)의 양덕사(陽德祠), 대구광역시의 표충사(表忠祠), 춘천의 도포(道浦)서원, 평산(平山)의 태백산성사(太白山城祠)에 제향되었다.

신숭겸(申崇謙)은 활솜씨가 뛰어났다. 태조 왕건과 함께 황해도 평산으로 사냥을 나갔다가 왕건이 날아가는 기러기 떼를 가리키며 “저 기러기 떼 중 앞에서 세 번째로 가는 기러기의 왼쪽 날개를 맞춰 보라.”라고 명하자 화살을 쏴서 기러기를 떨어뜨렸다는 일화가 남아 있으며, 세 번째 기러기를 화살로 맞추었다고 하여 이 모습과 비슷한 한자인 申(신)씨 성과 본관인 평산(平山) 땅 300결을 하사받아 평산신씨(平山申氏)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이 300결의 땅을 궁위전(弓位田)이라고 하며 궁위방(弓位坊)이라고도 한다. 그의 후손 어사대부 신군평(申君平)의 묘도 이 궁위방에 맀는 것으로 추정된다.

No 92. ☞. 언제? 어디를? = 2025.01.20. 대구시 동구 평광동 108에 위치한 모영재(慕影齋)는(은)  1931년에 건립된 평산 신씨 문중의 재실로, 고려 개국공신 장절공 신숭겸 장군의 유덕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모영재(慕影齋)’는 영각(影閣)을 추모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이 재실은 남서향으로 자리 잡고 있으며, 정면 4칸, 측면 1.5칸 규모의 일(一) 자형 건물로, 홑처마 맞배지붕 구조를 갖추고 있다. 평면 구성은 좌측부터 2칸 온돌방, 1칸 대청, 1칸 온돌방 순으로 배열되어 있으며, 전면에는 반 칸 규모의 툇간이 설치되어 있다. 좌측 2칸 온돌방은 실내에 두 짝 미서기문을 달아 공간을 나누어 사용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건물 뒤편에는 1832년(순조 32년), 후손 신정위가 신숭겸 장군의 공덕을 기려 세운 신숭겸영각유허비가 세워져 있다. 모영재는 일제강점기 영남 지역 문중 재실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며, 특히 건물의 지붕 형식이 향교 사당인 대성전과 같은 맞배지붕을 채택한 점이 주목할 만하다. 매년 음력 9월 9일에는 평산 신씨 문중에서 합동 향사가 거행되고 있다.

모영재가 위치한 평광동 입구에서 모영재에 이르는 길은 왕건의 도피로였던 것으로 전해지며, 왕건임도라는 별칭으로 불린다. 주변에는 첨백당이 자리하고 있으며, 팔공산 올레길 4코스 ‘평광동 왕건길’에 속한다. 평광동은 사과마을로도 잘 알려져 있으며, 효자나무를 비롯한 다양한 볼거리와 즐길 거리가 풍부한 관광지이다.

No 93. ☞. 언제? 어디를? = 2022.12.02. 동구 동내동 1112-2 (동호유적공원 내)에 위치한 동호서당(東湖書堂)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 활약한 면와 황경림(1566~1629)을 기리기 위해 1820년 세워진 유서 깊은 서당입니다.  동호서당(東湖書堂)은 본래 황경림의 무덤 옆에 있는 제사를 지내는 곳이었습니다.   황경림은 임진왜란 때 경상북도 경산시 하양읍 지역의 의병장으로 활동하였으며, 곽재우, 권응수 등과 함께 공을 세웠습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난 뒤에는 동내동에 승방재를 짓고 후손들을 가르치는 일을 했습니다.
동호서당(東湖書堂)은 1820년에 세운 동호사에서 시작하여 후손들을 가르치는 동호서당으로 바뀌었습니다.   동호서당은 흥선대원군에 의해 없어졌으나 1875년에 다시 세워졌으며 2번에 걸쳐서 수리하였습니다.
동호서당(東湖書堂)은 정면 4칸, 옆면 1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입니다.  구조는 왼쪽에 방이 있고 오른쪽에 마루가 있으며 방 앞에 작은 마루가 있습니다. 담장은 흙돌담이며 담 위에 기와를 얹었습니다.

No 94. ☞. 언제? 어디를? = 2026.06.29. 대구시 수성구 성동로37길 39-3에 위치한 고산서당(孤山書當)(는)은 1694년(숙종 20) 지방유림이 이황(李滉)과 정경세(鄭經世)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맡아오던 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가, 1935년부터 고산서당이라 명명하여 서당으로 사용하고 있다. 경내의 건물로는 4칸의 정당(正堂)과 문루 · 서당 · 협문 · 초가 등이 있다.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공을 세운 분들을 추모하고 후세에 귀감이 될 수 있도록 찬양하기 위해 세운 충의 추모비가 있습니다.

고산서당(孤山書當) 느티나무라고도 불리는 선동 느티나무는 오랜 세월 고산서당을 지켜온 수령 300여 년의 두 그루의 느티나무입니다.

현재의 고산서당(孤山書當)에는 구도문(求道門)이라 쓰인 현판이 걸려 있고, 초가에는 고자(庫子)가 살고 있다.  과거 서원에서는 매년 3월 중정(中丁 : 두번째 丁日)과 9월 중정에 향사를 지내왔으며 제품은 4변(籩) 4두(豆)이었다.
지금은 정일이 없이 1년에 한 차례 지방유림들이 모여 선현을 추모하기 위한 회합을 가지고 있다.  

2020년 5월에 고산서당(孤山書當) 정비복원공사 사업으로 준공된 사당으로, 퇴계 이황 선생과 우복 정경세 선생, 달성 삼현 중 한 분인 동고 서사성 선생을 새로이 추대하여 성현 3분의 위패를 모시고 있습니다.

영남대 민속촌은 캠퍼스 내에 조성된 아시아 최대 규모의 대학 야외 박물관입니다. 안동댐 수몰 지역 등에서 옮겨온 구계서원, 화산서당, 까치구멍집 등 7채의 전통 고택이 2만여 평의 자연 숲과 어우러져 훌륭한 산책로를 제공합니다.

No 95. ☞. 언제? 어디를? = 2026.06.29. 경산시 대학로 280 (영남대학교 내)에 위치한 구계서원(龜書溪院)(는)은 1696년(숙종 22)에 도동서원(道東書院)이라는 이름으로 세워졌으며 1713년(숙종 39)에 이건하여 구계서원(龜溪書院)이라 개칭하였다.  1871년(고종 8)에 훼철되어 1896년(건양 1)에 복원되었다.  역동 우탁(易東 禹倬)선생을 모시기 위해 건립한 서원인데, 원래 안동군 월곡면에 있던 것을 안동댐이 건설되면서 1975년에 현재의 위치인 영남대학교 민속원으로 이건하였다.

조선조에 와서 이황(李滉)의 발의로 1570년(선조 3) 예안에 역동서원(易東書院)이 창건되었으나, 1871년(고종 8)에 훼철당했다가 1966년 복원되었다.  또 다른 서원인 구계서원(龜溪書院)은 영남대학교 구내로 옮겨졌다. 시호는 문희(文僖)이다.

1975년 이건할 당시에는 강당인 독역재 밖에 없었으나, 2000년 11월에 慕賢祠, 내삼문, 일신재, 시습재, 진덕문을 복원하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매년 10월 하정(下丁)에 향사를 지낸다. 강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 기와집인데, 평면은 중당협실형(中堂挾室形)이며 가구(架構)는 오량구(五樑架)이다.

1)사당
사당인 모현사(慕賢祠)는 우탁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으며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맞배지붕의 겹처마로 되어있다. 가구는 3량가의 이익고의 집으로 구성되어 있다.
2)강당
강당인 독역재(讀易齋)는 정면 5칸, 측면 2칸규모의 팔작지붕 홑처마 집으로 전면에는 툇마루를 두고 있다. 독역재는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구성되어 있으며, 가구(架構)는 5량(樑)으로 이루어진 민도리집이다.
3)동재·서재
동재인 일신재와 서재인 시습재는 익공집으로 똑같은 크기의 건물로 되어 있으며, 책판 및 유물을 보관하는 곳이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정면에는 툇마루가 있다. 건물의 뒤로는 협문이 있다.

No 96. ☞. 언제? 어디를? = 2026.06.29. 경산시 대학로 280 (영남대학교 내)에 위치한 화산서당(花山書當)(는)은 "만회당 장경우(1581∼1656)가 후진을 양성하기 위해 효종 2년(1651)에 세운 건물이다.
장경우는 조선 중기 학자로 정묘호란 때 인동 의병장으로 활약하고 후진교육에 힘썼으며 『여헌문집』, 『만회당집』 등의 저서를 남긴 분이다.

화산서당(花山書當)은 원래 칠곡 석적읍 성곡리에 있었으나, 사림의 여러 의견에 따라 헌종 6년(1840)에 석적읍 중리에 옮겨 세웠다.  이 때 선현의 위패를 모시는 건물을 새로 세웠으나,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고종 8년(1871) 해체되어 지금은 강당과 양예청만 남아 있다.   후에 관리를 위하여 2009년 영남대학교 內의 지금 있는 자리에 옮겨 세웠다.
강당은 규모가 앞면 5칸·옆면 3칸이다.   가운데에 개방된 마루를 두고 양쪽으로 온돌방을 둔 형태이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지붕의 처마는 완만한 곡선을 이루는데, 우리나라 전통가옥 지붕에서 볼 수 있는 곡선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주변 관광지, 볼거리로는 
§.민속촌 내 고택 산책 : 구계서원, 일휴당, 화산서당 등 안동댐 수몰 지역에서 옮겨온 조선시대 고택 7동을 둘러보며 고즈넉한 분위기를 즐길 수 있습니다.  
§.영남대학교 민속촌.러브로드 및 거울못 : 민속촌 동쪽에 위치하며, 벚꽃과 단풍이 아름다워 사계절 내내 산책하기 좋은 명소입니다.
§.영남대학교박물관 : 민속촌 인근(지하철 영남대역 도보 3분)에 위치해 있으며, 약 2만여 점의 민속 유물과 발굴 유물, 고대 역사를 관람할 수 있습니다.
§.경산 인근 추천 명소반곡지 : 영남대에서 차량으로 약 20분 거리(경북 경산시 남산면)에 있는 드라마 촬영지로, 수백 년 된 왕버들 나무와 반영이 아름다운 인생샷 명소입니다.
§.남매지(남매공원) : 영남대역에서 가까운 도심 속 호수 공원으로, 산책로가 잘 조성되어 있고 분수쇼를 감상할 수 있습니다.
§.삼성현역사문화공원 : 영남대 민속촌에서 차량으로 약 15~20분 거리이며, 넓은 잔디밭과 레일썰매, 전시관이 있어 가족 단위 나들이로 좋습니다.

No 97. ☞. 언제? 어디를? = 2026.06.30. 대구시 북구 이곡길69-5(서변동)에 위치한 이우당(二憂當)(는)은 고려 말의 충신이자 두문동 72현 중 한 명인 이우당(二憂堂) 이경(李瓊, 1337~?) 선생의 위패를 모신 사당(재실)입니다.  

이우당(二憂當)  이경 선생은 고려 충정왕 때 신동으로 불렸고 진사에 급제했으나, 1392년 조선이 건국되자 이에 항거하여 고려 왕조에 대한 충절을 지키며 개성 두문동으로 들어간 인물입니다. '이우당'이라는 호는 야은 길재가 지어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주변 관광지, 볼거리로는 
§.팔공산 자락과 동화사: 차량으로 약 15분 거리에 있어 자연 속 산책과 사찰 관람을 동시에 즐길 수 있습니다.동촌유원지: 금호강을 따라 산책로와 카페, 오리배가 조성되어 있어 데이트 및 나들이로 방문하기 좋습니다.화암서원: 북구 노곡동에 위치한 역사적인 유적지로, 고즈넉한 한옥의 정취를 느낄 수 있습니다.

No 98. ☞. 언제? 어디를? = 2013.08.01. 전라남도 고흥군 덕양서원길 197-14에 위치한 덕양서원(德陽書院)(는)은 1589년(선조 22) 지방유림의 공의로 신숭겸(申崇謙)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모든 건물이 불타고 사우와 위패만 보존되어 오던 중, 1603년에 사우를 중수하고 1665년에 서원의 규모를 갖추어 건물을 중수하였다.
그 뒤 1695년(숙종 21) ‘德陽(덕양)’이라고 사액되어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그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가 1934년 지방유림에 의하여 복원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덕양서원(德陽書院)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사우(祠宇), 3칸의 연서재(燕序齋), 3칸의 신덕재(愼德齋), 내삼문(內三門), 3칸의 강당, 2칸의 전사청(奠祀廳)과 비각(碑閣) · 외삼문(外三門) · 고직사(庫直舍) · 중수비(重修碑) 등이 있다.
사우에는 신숭겸 장군의 위패와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연서재와 신덕재는 각각 동재와 서재로서 향사 때 제관들의 숙소 겸 학문의 강론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강당은 서원의 여러 행사나 유림의 회합장소로 사용되며, 전사청은 제향시 제수(祭需)를 마련하여 보관하는 곳이다.
내삼문은 성인문(成仁門)이라 하여 중앙의 신문(神門)과 양쪽 협문으로 되어 있으며, 고직사는 관리인이 주거하고 있다. 매년 음력 2월 중정(中丁)과 8월 중정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덕양서원(德陽書院)은 서원 철폐를 단행한지 10년이 지난 1881년, 신숭겸 장군의 후손이면서 전라 병마사였던 신헌이 글을 짓고 형조판서 신정희가 글을 써 훼철된 덕양서원의 터에 안타까운 마음을 담아 기적비와 비각을 세웠습니다.(신숭겸 장군의 비각과 위패가 모셔진 사당: 덕양사(德陽祠) 

No 99. ☞. 언제? 어디를? = 2024.12.27. 대구시 달성군 하빈면 묘동4길 21에 위치한 낙빈서원(洛濱書院)(는)은 1679년(숙종 5)에 정구(鄭逑)와 장현광(張顯光) 등을 중심으로 한 지방유림의 공의로,사육신 박팽년(朴彭年)·성삼문(成三問)·이개(李塏)·유성원(柳誠源)·하위지(河緯地)·유응부(兪應孚) 등 사육신의 절의를 추모하기 위해 사우를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694년(숙종 20)에 ‘낙빈’(洛濱)이라고 사액되어 사액서원으로 승격되었으며, 선현 배향과 지방 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9년(고종6)에 훼철되었다가 1982년 지방유림에 의하여 복원되었다.


No 99. ☞. 언제? 어디를? = 2024.12.27. 대구시 달성군 하빈면 묘동4길 21에 위치한 낙빈서원(洛濱書院) 경내의 건물로는 5칸의 숭절당(崇節堂)과 태고정(太古亭) 등이 있다.  묘우(廟宇)인 숭절당에는 사육신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으며, 태고정(太古亭)은 강당 겸 재사(齋舍)로 사용하고 있다.  태고정(太古亭)은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되어 있는데,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의 토론 장소로 사용된다. 또한 사육신의 사적비가 그곳에 있으며, 별실에는 고자(庫子)가 기거하고 있다.
낙빈서원(洛濱書院)에서는 해마다 봄·가을에 향사를 지내왔으나 복원된 뒤부터는 8월 중정에만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제품(祭品)은 4변(籩) 4두(豆)이다.  유물은 6·25사변 때 대부분 소실되었으며, 초서로 쓴 『천자문』과 서원기록문서가 남아 있을 뿐이다.

No 100. ☞. 언제? 어디를? = 2023.03.07. 대구시 달성군 옥포면 옥포로57길 25-14 (기세리)에 위치한 소계정(小溪亭)(는)은 1923년 석재준의 업적을 기억하기 위하여 제자들이 지은 것입니다.  소계 석재준(小溪 石載俊)은 나라를 일본에 뺏기자 슬퍼하며 시골의 마을에서 학교를 열어 학생에게 외국의 풍속에 물들지 않게 하고 선비 정신을 일깨웠다고 합니다.
소계정(小溪亭)은 경사진 땅에 세웠는데 계단을 오르면 문이 있고 문에 들어가면 3칸 규모의 정자가 있습니다.  기와집이며 마루를 중심으로 오른쪽과 왼쪽에 각각 온돌방을 두었습니다. 

☞.주변 관광지, 볼거리로는 
§.송해공원 (옥연지) : 소계정과 인접한 곳에 위치한 저수지 둘레길로, 수상잔도와 백세교, 물레방아, 송해기념관도 함께 있어 산책하기 매우 좋습니다. 
§.송해공원(옥연지).용연사 및 용연사 벚꽃길 : 비슬산 기슭에 자리 잡은 고즈넉한 사찰로, 봄철 벚꽃길 드라이브 코스로 유명하며 보물 제539호 석조계단 등이 있습니다.
§.남평문씨본리세거지 및 인흥서원 : 전통 한옥이 잘 보존된 마을로 고풍스러운 돌담길과 웅장한 은행나무가 있어 사진 찍기 좋은 곳입니다.
§.마비정 벽화마을 : 옛 시골 마을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아기자기한 벽화와 체험거리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No 101. . 언제? 어디를? = 2026.07.03. 대구시 북구 사수동 809에 위치한 한강공원(寒岡公園)은 동구의 망우당공원, 달서구의 월곡공원과 더불어 특정인의 아호(雅號)를 따서 이름을 붙인 대구시의 3개 공원 중 하나이다. 즉 한강공원은 조선 중기 성리학자 한강 정구(鄭逑)를, 망우당공원(忘憂堂公園)은 망우당 곽재우(郭再祐)를, 월곡공원(月谷公園)은 월곡 우배선(禹拜善)을 기리기 위해 조성했다.
사양정사(泗陽精舍)() 조선 중기 성리학자 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1620)가 손수 지어 1617년부터 1620년 돌아가실 때까지 제자들을 가르치고 저술 활동을 했던 곳이다. 한강은 고향 성주를 떠나 산수가 수려한 김천 무흘정사에 머물렀다. 그러나 동문수학했던 정인홍과의 갈등 박이립이라는 사람의 무고 등으로 거처를 옮겼다.
1612년(광해군 4) 1월 나이 70세에 이르러 제자 이서, 장현도, 송원기, 이언영, 이윤우 등의 권유와 그들이 마련한 노곡정사(蘆谷精舍, 현, 칠곡군 왜관읍 낙산리 가실성당 부근)로 옮겼다.
그러나 뜻하지 않는 화재로 정사가 불타자 1614(광해군 6) 1월 72세의 노구를 이끌고 다시 북구 사수로 옮겨왔다. 1617년(광해군 9) 75세 때인 7월에는 풍병을 치료하기 위해 동래온천에 다녀와서 9월에 짓기 시작했다. 자재와 일손 부족 등으로 어떤 날은 스스로 일을 하며 몸과 마음이 축날 정도로 고충이 많았으나 그해 겨울 완공했다.
세 칸 중 서쪽 두 칸은 서재로 하여 이름을 지경재(持敬齋)와 명의재(明義齋)라 하고, 동쪽 한 칸은 대청으로 하여 이름을 경회당(景晦堂)이라 하였으며, 남쪽 행랑채는 누각으로 하여 이름을 망로헌(忘老軒)이라 하였다. 이것을 모두 합쳐 사양정사라 하고 자호(自號)를 사양의 병든 늙은이 즉 사양병수(泗陽病叟)라 하였다. 이후 1620년 1월 별세할 때까지 2여 년 동안 강학과 저술 활동을 했다.

한강 선생()은 이곳에서 『오선생예설』, 『예기상례분류』, 『오복연혁도』, 등 예학을 완성 시켜 남인 예학을 대표하는 학자로 위상을 확립했고, 대구지역에 많은 제자를 길러냄으로 대구 유학을 발흥시켰다.
1651년(효종 2) 11월 주민들이 공의를 모아 사양서원(泗陽書院)으로 승격시켜 석담 이윤우 종사(從祀)하였다. 1694년(숙종 20) 발암(현, 칠곡군 지천면 신동 서원길 15-10)으로 옮겨 짓고 송암 이원경(李遠慶)을 별사(別祠)에 추향(追享)했다. 그러나 서원철폐령 때 훼철되어 현재 강당(경북 문화재자료 제117호)만 남아 있다. 지금의 사양정사는 한국토지주택공사가 일대를 택지로 개발하면서 2013년 한강공원조성과 더불어 복원했다. 당초 보다 규모는 크나 방은 개방해 화재를 예방하고자 했다. 의성인 김창회가 중수 기문을 썼다.
유허비는 사수동 811 한강공원에 있는 한강 정구(鄭逑, 1543~1620)의 유허 빗돌이다.

사수동의 유래비가 세워져 있어요. 물과 산의 정기가 모인 곳 원래 이름은 사빈이었다고 합니다.
조선 중기 성리학자 한강 정구 선생이 1614년 이곳에 이거하여 마을을 사수로 개정하였으며 공자 마을의 강 이름을 따 온 것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 조선 유학자 정구 선생을 기리는 한강근린공원 ] 

No 102. . 언제? 어디를? = 2026.07.03. 대구시 북구 서변동 1271에 위치한 모선당(慕先堂)(는)은 능성구씨 문중에서 세운 재실입니다. 이곳은 능성구씨 5·6·7대조 선조를 추모하고 향사를 치르기 위해 건립되었으며, 주변에는 선조들의 추모비도 함께 자리하고 있습니다.

 ☞. 언제? 어디를? = 창포재(菖蒲齎)(는)은 인조 17년(1639년)에 첨정 구회신을 기리기 위해 그의 아들 구인계가 건립한 유적입니다. 1944년에 중건된 팔작지붕 건물이며, 앞에는 약 400년 된 모과나무가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No 103. . 언제? 어디를? = 2026.07.03. 대구시 북구 서변동 1110에 위치한 송계당(松溪堂)()은  효종 10년인 1659년 후손들에 의해 지어져 1960년에 중건되었다. 정면 4칸 측면 1칸 반 규모에 청기와 팔작지붕 건물이다. 가운데 2칸은 대청, 양쪽은 온돌방으로 방 앞에는 단을 높여 난간을 두른 누마루 형식의 툇마루를 두었다. 송계당 뒤에는 별도로 담을 두르고 문을 낸 설단(設壇)이 있다. 단에는 능성구씨 선조들 중 묘가 실전된 두 분의 비석이 모셔져 있다. 그들은 구홍의 아들인 매헌(梅軒) 구종절(具宗節)과 손자인 송계(松溪) 구익령(具益齡)이다.

☞. 언제? 어디를? = 2026.07.03. 물소재(勿小齎)(는)은 문행으로 추앙받았던 그는 항일 독립운동가로 옥중 순절한 소봉(小峯) 구찬회(具燦會)의 아버지다. 물소재는 정면 4칸에 오른쪽 한 칸 앞에만 돌출된 누마루를 둔 ‘ㄱ’자 형식의 건물이다. 재실 옆에는 아름드리 팽나무와 상수리나무가 어엿하다.

송계당 아래에 있는 능성세가(綾城世家)가 허물어져 가는 모습입니다.  능성세가를 함께 둘러 보면 좋았겠는데 이제는 능성세가는 없어졌다고합니다.  능성세가(綾城世家) 는 1920년 건립된 가옥입니다.   후대에 유학자를 출세시켜 온 본체와 창강서실 외 삼동이 있었다고 해요.   항일 순의지사이며 독립유공자인 소봉 구찬회의 생가입니다. 
일자형 5칸으로 되어 있었다고 하네요.
[출처] [ 대구 북구 문화재 송계당,작성자 대구 북구청 ]

No 104. . 언제? 어디를? = 2026.07.03. 대구시 북구 동변동 산37에 위치한 영사재(永思齎)()은 1893년에 건립된 경주이씨(慶州李庄)의 재실입니다. 금남공(錦南公)이 종족들을 위해 토지를 희사한 음덕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으며, 현재 대구시 북구의 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현판에는 ‘경주이장(慶州李庄)’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건축 형태는 정면 5칸 규모의 일자형 겹처마집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No 105. ☞. 언제? 어디를? = 2025.05.15. 대구시 동구 팔공로 327-7 (봉무동)에 위치한 봉무정 (鳳舞亭)(는)은 조선 고종 12년(1875)에 봉촌 최상룡이 행정사무를 볼 수 있도록 마을사람들과 의논하여 지은 것이다.
원래 이 자리에는 달성군 공산면 4개 마을(강동·독좌·위남·단산)에서 쓰던 초가 사무소가 있었다. 이 4개 마을을 합쳐 봉무동으로 행정구역이 바뀌자 초가를 헐고 이 건물을 지었다.
강당을 중심으로 동쪽에 덕교재, 서쪽에 예용재가 있다. 강당은 농민들의 계몽과 마을 규약 등을 가르치고, 선비들이 모여 시를 짓고 풍류를 즐기던 곳이다. 덕교재와 예용재는 마을사람들이 모여 의논하던 곳이다.

화강석의 둥근 초석 위에 둥근 기둥을 세운 5칸 규모의 집으로 지붕은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으로 옆면에 내림지붕을 달았다.
§.봉무동(鳳舞洞)의 유래 : 봉무동 836번지 현 봉무정에 호를 구축하기 위하여 구덩이를 파니 땅 속에서 봉이 나와 북쪽으로 날아갔다 하여 봉이 춤추는 동이라고 불리어졌으며, 왕건이 앉았다는 독좌암에서 딴 이름 '독암' 금호강 동쪽마을이라는 강동마을과 단산, 위남 등의 자연 부락으로 형성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