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 이모저모/향교, 서원, 서당, 재실 탐방_

☞. 향교(鄕校), 서원(誓願), 서당(書當), 재실(齋室), 누정(樓亭) 탐방 ⑧

백고무신 부부 2026. 7. 4. 08:24

☞. 향교(鄕校), 서원(誓願), 서당(書當), 재실(齋室), 누정(樓亭) 탐방 어디까지 가 봤나요? ①~②~③~④~⑤~⑥~⑦에 이어 탐방은 계속 이어집니다.

⑧.(No 106~120) : 칠곡 지경당, 진주댁, 추보재, 독암서당, 성재서당, 첨백당, 와룡정, 경희정, 소계정, 인산당, 원모재, 도곡재(육신사), 

No 106. ☞. 언제? 어디를? = 2023.06.10. 경북 칠곡군 왜관읍 매원3길 104-5에 위치한 칠곡 매원마을 지경당 (止敬堂)(는)은 광주(廣州)이씨 집성촌인 이곳은 지난해가 입향조 석담 이윤우가 들어온 지 딱 400년이었다.  300~400여 호를 자랑하던 고택은 6·25전쟁 때 인민군 3사단 사령부였다는 이유로 미군의 폭격에 의해 대부분 불타 사라지고 60여 호만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석담의 후손 중 26명이 대과에 급제해 장원방(壯元坊)으로 불린 이 마을에선 일제 항쟁기 의열단원인 이수택을 비롯해 파리장서와 관련한 이이익과 이수일, 이수목·이두석 부자, 이달영, 이수각, 이석, 이항진 등 9명이나 되는 동족 독립유공자가 배출됐다.  낙동강 북쪽 안동 고성이씨 임청각과 의성김씨 내앞마을에서 숱한 독립운동가가 나왔다면, 낙동강 중류 지역은 성주 성산이씨 한개마을과 함께 매원마을이 대표적인 항일 명문가다.

매원마을은 번성기였던 1905년경에는 400여 가구가 거주할 정도로 큰 규모를 자랑했다.  복원사업을 통해 전통 한옥이 일부 매원마을은 풍수지리적으로 '매화낙지형(梅花落地形)'이라 불릴 만큼, 마치 매화꽃이 땅에 떨어진 듯한 지형을 가지고 있다.  매원마을은 상매(上梅), 중매(中梅), 하매(下梅)로 구분되며, 각 구역마다 전통 한옥과 초가, 그리고 문중의 재실, 서당, 문전옥답(집 앞의 기름진 논) 등이 분포해 있다.  마을 서쪽에는 비보수(裨補樹)로 조성된 소나무밭(동솔밭)이 있어, 풍수적으로 부족한 기운을 보완하고자 했던 선조들의 지혜가 엿보인다.
현재는 60여 채의 고택이 남아 있다.

No 107. ☞. 언제? 어디를? = 2023.06.10. 경북 칠곡군 왜관읍 매원3길 104-5에 위치한 칠곡 매원마을 진주댁 (晉州宅)(는)은 박곡 이원록의 9세손 상립에 의해서 건립되었다.
진주댁 (晉州宅)은 전면의 농경지와 동정천, 못안들 안산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원래 안채⋅사랑채⋅곳간채⋅대문채 등으로 이루어진 부유한 양반가 후예의 주택으로 보인다. 현존하는 안채와 사랑채는 일제 식민지배기의 새로운 양식이 부분적으로 수용되긴 했지만, 대체로 매원마을의 전통적인 건축 양식이 계승⋅유지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또한, 안채는 좌우측면에 눈썹지붕을 달아 실 공간을 효율적으로 확장했고, 대청 전면에 문을 달아 외기를 막도록 했다. 이런 모습은 실공간을 효율적으로 이용하고자 한 조선 후기 상류가옥 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연못 백연지가 내려다보이는 곳이다.

매원마을의 정취를 안채 툇마루에서 한 폭의 그림을 보듯이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매년 7월 중순, 연꽃이 필 무렵이 되면 연꽃을 감상하며 연밥과 연차 등을 맛보고 즐길 수 있다. 배산임수의 가옥 구조를 보며 옛 양반들의 지혜를 엿보며 힐링할 수 있는 공간이다.

No 108. ☞. 언제? 어디를? = 2025.05.28. 대구시 동구 도평로43길 94 (도동)에 위치한 추보재(追報齋)(는)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인 일직 손홍주가 도동 마을에 들어와 터를 잡은 선조인 손홍주의 재실이자, 조상의 무덤을 지키고 보호하는 곳입니다.  
추보재(追報齋)는 1932년에 처음 만들어 세워졌습니다. 대구 도동 추보재는 정면 3칸, 옆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로, 대청과 방이 있습니다. 대구 도동 추보재 바로 옆에 일직손씨 조상의 무덤이 만들어져 있습니다.

No 108. ☞. 언제? 어디를? = 2025.05.28. 대구시 동구 도평로43길 94 (도동)에 위치한 독암서당(獨岩書堂)은 조선 고종 2년(1865)에 경주 최씨(崔氏) 문중에서 봉무동에 세운 서당으로 ‘독암’이라는 명칭은 공산(公山) 싸움에서 고려 태조왕건이 견훤에게 패하여 도주하다가 혼자 앉아 쉬었다는 독좌암(獨座巖)이 근처에 있다, 하여 붙여진 것이다.   독좌암과 서당은 팔공산 진입로를 사이에 두고 동서로 500여m 떨어져 있다.   이 서당에서는 조선 말기 봉무향약(鳳舞鄕約)을 만든 최상룡(崔象龍)과 순종 때 관찰사를 지낸 최정덕(崔廷德)을 배출하였다.
건축형식은 도리 3개로 결구된 3량가(三樑架)이며, 홑처마에 맞배지붕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청은 우물마루로 짜여 져 있으며, 좌우에 방을 두었다. 건물의 앞뒤로는 툇마루를 둘렀다.

No.109. ☞. 언제? 어디를? = 2022.12.28. 대구시 동구 미대길 120 (미대동)에 위치한 성재서당(盛才書堂)은 인천채씨 성재 문중의 현조인 양전헌 채선견이 최초로 건립했으며 조선 인조(재위 1623∼1649)때 선비 채명보(1574∼1644) 선생이 학문을 강론하던 곳이다.  그 뒤 1800년대 초에  후손들이 선생의 덕행을 널리 기리고자 새로 짓고 ‘성재서당’이라 이름을  고쳤다.
채명보 선생의 휘는 선견, 자는 명보, 호는 양전헌이며 본관은 인천이다.

채명보 선생은 광해군 9년(1617)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서궁유폐 사건이 일어나자 선비들과 함께 상소를 올려 잘못된 점을 지적하였다.  인조 2년(1624) 이괄의 난 때에는 향병을 모집하기도 하였으며, 인조 4년에 희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받지 않았다.  고향으로 돌아와 성재정을 짓고 선비들과 학문을 논하면서 만년을 보냈다.

채선견은 이곳 성재정에서 당시 대구의 대표적 유학자인 손처눌·도신수·정극준·최동집 등과 교유하였다. 채선견의 호인 양전헌은 정구와 조호익의 양 문하에서 수학했다는 의미이다. 1627년(인조 5) 채선견이 건립한 성재정으로부터 시작된 이 서당은 1770년경 채선견의 증손자 채상정 때 중건하였다.  

근래에는 성재서당 주변에 대구올레 5코스인 성재서당 가는 길에 포함되어 찾는 이들이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대구올레 5코스는 구암마을 입구-동화천변-미타사-내동보호수-삼마산 능선길-성재서당-미대동입구로 봄과 가을에 걷기 좋은 길이다.

No.110. ☞. 언제? 어디를? = 2022.12.23. 대구시 동구 도평로 116길154에 위치한 첨백당(瞻栢堂)은 평광동 단양우씨 문중의 재실이다. 조선 후기의 선비 용강 우명식의 절의와 그의 증손자인 우효중의 효행을 기리고 추모하는 곳이다. 첨백당이란 당호는 선조인 우명식의 묘소가 있는 백밭골을 우러러보는 집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고종 33년(1896)에 지었고 1924년 새롭게 고친 적이 있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맞배지붕이고, 집 가운데는 대청마루가 있는데 양쪽 툇마루보다 높게 놓여 있는 것이 특징이다. 툇마루에는 난간을 아담하게 둘러 놓았다. 건물 내외벽과 기둥에는 편액·기문·시판·주련 등이 걸려 있다. 담장은 상부에 기와를 얹은 흙돌담이며, 대문은 3칸 솟을대문이다. 특히, 첨백당 앞에 자리잡고 있는 소나무는 1945년 광복의 기념으로 식수한 소나무로 100년 가까운 세월을 문중의 재실과 함께 자리하고 있으며 보호수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첨백당(瞻栢堂)이라는 이름은 우명식 선생의 묘소가 있는 ‘백밭골을 우러러보는 집’이라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다. 고종 33년(1896)에 지었고 1924년 새롭게 고친 적이 있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고, 집 가운데는 대청마루가 있는데 양이곳은 대구올레 팔공산 4코스인 평광동 왕건길과 가까이 도동측백문화마을이 있다.

와룡정(臥龍亭)은 단양우씨의 집성촌인 평광동은 대구 사과의 명백을 이어 오고 있는 곳이다.  평광동은 "사랑이" 마을이라고도 불리는데, 왕건과 관련된 일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927년 지묘동 일대에서 벌어졌던 공산전투에서 수세에 몰린 왕건은 불로동과 도동을 거쳐 평광동까지 이르게 되는데. 마을 어귀에서 나무꾼을 만나 주먹밥을 얻어 먹고 힘을 내어 도피한다.  왕건이란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나무꾼은 그를 찾아 이곳저곳 누볐으나 결국 찾지 못했고, 그 부근에서 왕을 잃어버렸다 해서 실왕리(失王里)라 부르다가  세월이 지나면서 사량이. 사랑이 동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와룡정은 조선후기 정자로 단양 우씨(丹陽 禹氏) 선조인 용재공(龍濟公) 우명재를 봉향하기 위해 고종 16년(18790) 건립 되었다.  원래의 위치는 현재의 위치 건너편 산 속 후미진 곳이였다.  후대에 와서 정자가 너무 외딴곳에 떨어져 있어 관리하기가 불편하여 1966년 현 위치로 이건 하였는데 와룡정이라 하게 된 연유는 동네 어귀 냇가에 와룡지처(臥龍之處)가 있다고 하여 골안 이름과 아울러 와룡정이라 했으며 후대 서당으로 활용했다.

경희정(景喜亭)은 단양우씨 예안군파 광리 문중의 조상인 우영석, 우규환, 우효봉을 추모하기 위한 재실 겸 정자입니다.  경희정은 정면 4.5칸, 옆면 1.5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입니다. 담장 아래는 자연석을 쌓고 위쪽에는 붉은 벽독을 쌓아 만들었습니다.  대문에는 ‘광거문’이라고 쓰인 편액이 걸려 있습니다.
단양 우씨 평광동 세거조(世居祖)인 우익신(遇翊臣)의 10세 손인 만희재 영석, 11세 손인 단봉 규환.12세 손인 운제 효봉을 위하여 삼대의 추원정(追遠亭)으로 후손들이 1970년에 건립한 것이다.
만희재는 경사에 박섭하고 위선사에 유성하였으며 후진 교육에도 힘써 수통장대부가 되었다. 한편 단봉은 관위원으로 식견에 풍단하고 시문에 능통하여 경향사우가 출중하였고 문집을 남기고 있다. 운재는 품성이 강명하고 규도가 엄정하며 덕망이 높았으니 기호동지와 같이 낙육재에 거쳐 하였으며 1913 - 1914년에 독립자금 사건으로 일경에 피체 되기도 하였다.

No.111. ☞. 언제? 어디를? = 2022.03.12. 대구시 동구 도평로38길 51 (도동)에 위치한 문창공영당(文昌公影堂)(는)은 최치원의 영정을 모시고 있는 건물로, 조선 영조(英祖) 31년(1755년) 해안현(解顔縣)에 세워졌던 계림사(桂林祠)가 서원철폐령(1864년)으로 철폐된 뒤, 1912년 경주 최씨 문중에서 위치를 구회당(九會堂) 뒤로 옮겨 지었다(《고운집》). 구회당은 도동 지역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던 경주 최씨 광정공파 문중의 재사(齋舍)였다.  이후 비행장 건설로 다시 위치를 옮겨 현재에 이르고 있다.
영당에 봉안된 최치원의 영정은 계림사가 철폐된 뒤인 1865년에 최치원의 후손 최흥원이 옮겨온 것이다.  1926년에 경주 최씨 문중이 최치원의 작품들을 모아 엮은 《고운집》에 실린 최치원의 후손 최국술(崔國述)이 계림사를 옮겨 세운 뒤에 지은 '계림사이건상량문'(桂林祠移建上樑文)에 따르면 이원(貳院, 계림사)이 철폐될 때 수습한 것으로서, 구당(九堂)의 협실(夾室)에 옮겨 봉안하고 있었는데 탁자를 놓는 사방의 공간이 협소해 제물(祭物)을 진설하고 참배하기에 편치 못한 점이 있었고, 집안의 재산이 넉넉하지 못해 공사를 차일피일 미루다 더는 미룰 수 없겠다고 생각하고 문중과 상의도 없이 공사를 시작했지만 마침 문중에서 관련한 논의가 일어나면서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시조가 남긴 업적을 후손에게 전한다는 이유 외에도 옛 현인을 모셔 백성들에게 민족의 정기를 심어주기 위한 뜻도 있었다.
앞면 3칸·옆면 1칸 규모이며 주위로 직사각형의 담장을 둘렀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으로 꾸몄고, 솟을대문에는 태극 모양을 그려 놓았다.

No.112. ☞. 언제? 어디를? = 2023.03.07. 대구시 대구시 달성군 옥포읍 기세리 714에 위치한 소계정(小溪亭)(는)은  향리에서 후학양성에 힘쓴 소계 석재준을 기리기 위해 1923년 그의 제자들이 건립한 것으로, 그의 호를 따서 소계정이라 하였다.
이 정자는 정면 3칸, 측면 1칸반 규모의 팔작지붕으로, 평면은 가운데에 마루를 두고 양옆에 방을 둔 영남지방의 일반적인 정자 형태를 취하고 있다.
소계 석재준(小溪 石載俊:1866∼1945)의 공을 기리기 위해 1923년 제자들이 지은 것으로, 호를 따라 ‘소계정’이라 부른다.  석재준은 학당을 열어 문하생들이 오랑캐의 풍속에 물들지 않게 하고 선비정신을 일깨워준 인물이다.  건물 규모는 앞면 3칸·옆면 1칸 반이며, 지붕은 옆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No.112. ☞. 언제? 어디를? = 2023.03.07. 대구시 대구시 달성군 옥포읍 기세리 714에 위치한 소계정(小溪亭)(는)은  향리에서 후학양성에 힘쓴 소계 석재준을 기리기 위해 1923년 그의 제자들이 건립한 것으로, 그의 호를 따서 소계정이라 하였다.
이 정자는 정면 3칸, 측면 1칸반 규모의 팔작지붕으로, 평면은 가운데에 마루를 두고 양옆에 방을 둔 영남지방의 일반적인 정자 형태를 취하고 있다.
소계 석재준(小溪 石載俊:1866∼1945)의 공을 기리기 위해 1923년 제자들이 지은 것으로, 호를 따라 ‘소계정’이라 부른다. 석재준은 학당을 열어 문하생들이 오랑캐의 풍속에 물들지 않게 하고 선비정신을 일깨워준 인물이다. 건물 규모는 앞면 3칸·옆면 1칸 반이며, 지붕은 옆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No.113. ☞. 언제? 어디를? = 2026.05.02. 대구시 동구 시지1동 산 115번지에 위치한 원모재(遠慕齋)(는)은  慶州人(경주인) 崔認(최인)을 추모하는 후손들에 의해 1890년 (고종 27년)에 세워진 것이다. 최인의 자는 달부, 호는 한천, 개국삼등공신 시호는 광정공으로 임란시에 동생 태동 계와 장질 우락재 동보 등 삼숙질이 창의하여 화원, 달성 등지에서 적을 무찌르고 방어사 곽재우와 합세, 화왕산성 전투에서 전공을 세웠다. 임란후,팔공산 대곡에서 독서로 여생을 보냈는데, 200여년간 공의 사적이 묻혔다가 허씨가에서 임진창의록이 발견되어 당시 관찰사 윤광안이 이를 상주하여 1812년(순조 12년)에 증사헌부 지평이 되고, 1836년(헌종 2년) 사림의 발의로 지묘동에 평천사(삼충사)를 세워 삼충을 봉향하였다. 재실의 규모는 정침이 방 3칸, 대청 2칸에 홑처마 박공지붕으로 1955년에 중건한 기록이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