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향교(鄕校), 서원(誓願), 서당(書當), 재실(齋室), 누정(樓亭) 탐방 어디까지 가 봤나요? ①~②~③~④~⑤~⑥~⑦~⑧에 이어 탐방은 계속 이어집니다.
⑨.(No 121~135) : 중심재, 덕양재(월곡역사공원), 열락당(월곡역사공원), 첨모재.사효당, 추모재, 월곡정사, 경인재, 저존재, 대곡영각, 원사제(천주교 도원성당), 방해재, 도원재, 용담재, 원사재(북구 조야로), 금산재(화수당), 표절사(화수정),

No.121. ☞. 언제? 어디를? = 2022.11.24. 대구시 동구 용수동 329에 위치한 중심재(中心齋)(는)은 달성 서씨 시조 서진(徐晋)의 현손인 구계(龜溪) 서침(徐沉)의 묘제를 주관 하는 재실이다, 구계(龜溪) 서침(徐沉)은 세종 1424년 선생의 세거지인 달성(달성 공원)을 헌납 하시어 자손 대대로 국록을 준다고 하였으나 이를 사양하시고 부민의 조적 감모(糶糴減耗)를 한섬당 5되씩 하여 줄 것을 상소 하여 국말 까지 500여년간 크 시혜를 입었다,
선생의 위민 자선(爲民慈善)의 혁공을 기리기 위하여 현종 6년 유림 에서 구암서원 숭현사를 세워 매년 음력 9월초 하루에 향례를 봉행 하고 있다.

No.122. ☞. 언제? 어디를? = 2026.07.08. 대구시 달서구 상인동 883-1에 위치한 덕양재(德陽齋)(는)은 원래는 달성군 월배면 상인동 3구에 儒學者(유학자) 禹東주珪(우동규, 1847-1933)의 講學堂(강학당)으로 세워진 것인데 당시는 草家(초가)였던 것들 1946년 해방 이듬해에 원래의 장소곁에 기와로 重修(중수)하여 줄곧 내려오다가 1995년에 현재의 위치로 다시 移建(이건)한 것이다. 180여평 대지에 방 2칸, 대청 1칸을 화강석 축대위에 덧문을 단 팔작지붕으로 세웠다.
禹東珪(우동규)의 자는 允執(윤집), 호는 夢岩(몽암)이다 易來先生(역래선생) 白雲(백운) 晫(탁)과 杜門洞(두문동) 72賢(현)의 首座(수좌)로 나중에 영의정으로 증직되고 시호가 忠貞公(충정공)인 養浩堂(양호당) 玄寶(현보)의 后(후)로서 書藝(서예)로도 이름이 나 달성군 다사면에 있는 義兵將(의병장) 月谷(월곡) 禹拜善(우배선) 先生(선생)의 遺壇碑(유단비)의 글씨도 그가 썼다 한다.

No.123. ☞. 언제? 어디를? = 2026.07.08. 대구시 달서구 상인동 883-1에 위치한 열락당(悅樂堂)(는)은 조선후기 대구시 출신 의병장 월곡 우배선(月谷 禹拜善)의 우국충정과 선비 정신을 기리는 재실이다. 달서구 상인동 월촌마을에 있는 월곡역사공원내에 위치하고 있다. 임진왜란 때 24세의 나이로 의병을 일으켜 전공을 세운 의병장 월곡 우배선(1599~1620)이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온 후 강학소를 마련하고 학문을 강론하던 곳으로 당호를 열락당(悅樂堂)이라 하였던 것이다.
이 재사는 그동안 퇴락하여 원래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던 중 1995년 종중에서 뜻을 모아 장지산 기슭에 중건하여 추모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 월곡 우배선의 의병 투쟁과 우국의 선비 정신을 기리려는 종중의 열망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건물 규모는 솟을대문에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방 3칸, 대청 2칸 골기와 팔작지붕에 기와 돌담으로 주위를 둘렀다.
열락당이 위치한 공원에는 산책로, 쉼터, 놀이터, 연못 등이 있으며 계절을 달리해 피는 꽃이 아름다우며 특히 대나무 숲길은 열락당과 더불어 월곡역사공원의 또 다른 볼 거리이다.

No.124. ☞. 언제? 어디를? = 2026.07.08. 대구시 달서구 월곡로26길 17-39 (상인동)에 위치한 첨모재.사효당(瞻慕齋思效堂)(는)은 밀양 손씨(密陽 孫氏) 호군(護軍) 손경방(孫敬邦)을 추모하는 재사(齋舍)와 인재(仁齋) 손경규(孫景奎)의 부병(父病)에 작지주혈(斫指注血)하는 등의 효(孝)를 기리기 위한 사효당(思孝堂)이다. 이 두 곳은 밀양 손씨 문중(門中)에서 관리하는 전통 한옥 건축물로
첨모재(瞻慕齋) : 손극룡과 그의 아들 손경방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재실입니다. 손경방은 1678년 무과에 급제하여 절충장군부호군을 지냈습니다.
사효당(思效堂) : 첨모재 부근에 자리한 건물로, 인재 손경규의 효행을 기리는 곳입니다. 손경규는 부친의 병환 때 손가락을 잘라 피를 먹여 연명케 하고, 부친이 별세하자 상례를 다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No.125. ☞. 언제? 어디를? = 2026.07.08. 대구시 달서구 상인동880에 위치한 추모재(追慕齋)(는)은 단양(丹陽) 우씨(禹氏) 입향조(入鄕祖)인 우존(禹尊)의 6세손(世孫)인 통훈대부(通訓大夫부) 여의현감(旅義縣監) 여도(汝度), 자는 흠재(欽哉), 호는 만모당(晩侮堂)을 추모하기 위해 후손들이 1869년에 건립하고 경도재(景陶齋) 우성규(禹成圭)가 상량문(上樑文)을 찬(撰)하였다. 그 뒤 1979년 9월에 현재의 위치로 이건(移建)하였다.
200여평 대지에 정침(正寢)이 방 3칸, 대청 2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와즙으로 화강석 축대위에 세웠다.

No.126. ☞. 언제? 어디를? = 2026.07.08. 대구시 달서구 송현로7길 38에 위치한 월곡정사(月谷精舍)(는)은 조선 중기 의병장인 월곡 우배선(1562~1620) 장군이 후진을 양성하고 학문을 강론하기 위해 1607년에 건립한 역사적인 건축물입니다.
월곡정사(月谷精舍)는 단양우씨 판서공파 문중의 재실이자 서당 역할을 하던 곳으로,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이끌었던 장군의 구국 정신과 유학을 수양하던 선조들의 발자취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의미 깊은 공간입니다. 현재 이곳이 있는 월곡역사공원은 단양 우씨 집성촌이 자리 잡았던 곳으로, 정사 외에도 유물과 기록을 보존 중인 월곡역사박물관과 낙동서원 등 다양한 역사 문화재가 함께 자리 잡고 있습니다.


No.127. ☞. 언제? 어디를? = 2026.07.08. 대구시 달서구 송현로7길 32에 위치한 경인재(敬仁齋)(는)은 우재악(禹載岳·1734∼1814)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지은 재실이다. 공의 자는 탁중(卓中), 호는 인촌(仁村)이며, 월곡선생의 6세손이다. 조부는 우홍수(禹洪受)로 권상하(權尙夏·1641∼1721)의 문인이다. 1795년(정조19) 경상감영에서 고래의 명언명구를 모은‘오경백선(五經百選)’을 교정한 공로가 인정돼 시경, 맹자, 주서백선(朱書百選) 등을 조정으로부터 상으로 하사받았다. 다음 해에 덕행으로 천거되어 휘릉참봉(徽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1813년에 팔십 노인으로 통정대부에 올랐다. 공의 시문집인 ‘인촌선생문집(仁村先生文集)’이 있다. 경인재 옆 오른편에는 거북모양의 높은 좌대 위에 오석으로 비신을 만든 ‘통정대부 휘릉참봉 인촌선생 사적비’가 위용있게 서있다.
경인재 처마 중앙에 해서체 글씨로 쓴 편액과 실내에는 경인재를 짓게 된 내력을 자세히 적은 ‘경인재기’가 걸려 있다.
源遠流長 百支同淸(원원유장 백지동청)
根深枝茂 萬葉具香(근심지무 만엽구향)
日暖春堂 花樹同榮(일난춘당 화수동영)
無爾祖 聿修厥德(무첨이조 율수궐덕)
衆我後孫 洞屬自持(중아후손 통촉자지)
샘의 근원이 멀면 흐르는 물도 유장하며 백 갈래의 물도 다 같이 맑다네
뿌리가 깊으면 가지도 무성하며 온갖 나뭇잎도 모두 향기롭다네
햇살이 춘당에 따스하니 꽃이 피고 나무들도 무성하네
너의 조상님 욕되게 함이 없이 선조의 덕을 삼가 그대로 닦을지어다
많은 우리 후손들이여 밝게 통찰하여 스스로 유지하세.
유구한 가문의 내력을 샘물과 나무에 비유하여 말하고 있다. 그 자손들이 번성하여 문호를 빛내 줄 것을 기원하며, 조상님을 욕되게 하지 말고 그 덕행을 이어가며 잘 처신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No.128. ☞. 언제? 어디를? = 2026.07.08. 대구시 달서구 대곡동 1159에 위치한 저존재(著存齋), 대곡동 산26에 위치한 대곡영각(大谷影閣)(는)은 경주 최씨(慶州崔氏) 대곡 입향조인 매영헌 최효열(梅永軒 崔孝烈, 1563~1622)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후손들이 건립한 재실입니다.최효열 선생은 임진왜란 당시 창의하여 공을 세운 인물로, 저존재는 선생과 관련된 유적지인 대곡영각(大谷影閣) 바로 뒤 산기슭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대곡영각(大谷影閣)(는)은 솟을 대문과 토석(土石) 개와담으로 둘러진 영각(影閣)은 시멘트 기단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 부연을 단 맞배 지붕으로 새운 사당(祠堂)인데 영정(影幀)은 동구(東區) 도동(道洞)에 있는 영당(影堂)의 영정(影幀)을 본으로 하여 제작한 것이다.
대곡동은 본래 '골이 깊고 크다'는 의미인 순우리말 '한실'로 불리던 지역입니다. 이 마을이 점차 큰 마을로 발전하면서 '큰 골짜기'라는 뜻을 담아 한자로 대곡(大谷)으로 표기하게 되었습니다. 과거에는 행정구역상 인흥면에 속했으며 '갈밭', '새악단' 등의 자연 마을로 나뉘어 오다 현재의 명칭으로 굳어졌습니다.

No.129. ☞. 언제? 어디를? = 2026.07.08. 대구시 달서구 도원동 1451-1번지에 위치한 원사제(遠思齋):천주교 도원성당(는)은 대구대교구 소속으로 1998년에 설립되었으며, 조용하고 평화로운 분위기를 자랑합니다.(주보성인 :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No.130. ☞. 언제? 어디를? = 2026.07.08. 대구시 달서구 도원동 1117에 위치한 방해재(放海齋)(는)은 고령 김씨 가문의 조상을 모시는 재실(齋室)로 1943년 김용하 선생이 서당으로 건립한 한옥입니다.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여 '숲밭'이라 불렸던 수밭마을에 자리 잡고 있다.라고 하는데 흔적을 찾아 볼 수 없다.
No.131. ☞. 언제? 어디를? = 2026.07.08. 대구시 달서구 수밭길 85에 위치한 도원재(桃源齋)(는)은 밀양박씨 문중의 재실입니다. 이곳은 임진왜란 때 이곳에 산성을 쌓고 항전한 밀양박씨의 도원동 입향조 '박민호(朴民浩)' 참봉 어른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된 역사적인 장소입니다.라고 되 있으나 흔적을 찾아 볼 수 없다.

No.132. ☞. 언제? 어디를? = 2026.07.10. 대구시 북구 산격동 878에 위치한 용담재(龍潭齋)(는)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한 서사진 선생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달성 서씨 문중이 1650년(효종 1년)에 건립한 재실입니다. 용담재는 고종 25년 1888년에 중수하였다고 합니다. 원래 이 자리에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 자리에 경북 학생과학관이 지워져 이후 1976년에 이 자리로 옮겨진 용담재는 산격동 가파른 언덕에 비탈지고 양지 바른 곳에 세워져 있는 용담재는 1976년에 1km 떨어진 곳에서 북쪽으로 옮겨 왔다고 하는데, 삼량집에 홑처마 4칸 집이며, 지붕은 맛배 지붕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용담재 안 마당에 있었다는데 지금은 공사중이라 존재하지 않습니다.(빌려 옴)

서명보 효자각(徐命普 孝子閣)은 1802년에 건립하였으나 몇번의 이전을 하면서 1976년 이곳으로 옮겨졌다고 하였습니다.
달성서씨의 17세손으로 현감공파 서제의 10세손이며, 서사진의 5세손인 서명보 효자는 부친의 병간호를 극진히 하였다고 하는데요.
그가 죽은 후 21년이 지난 후 24년 동안 부친의 병간호를 하면서 올렸던 탕약을 기록한 '시탕록'을 조정에서 보고 감탄하여 효자각을 세워 주었습니다.
효자각 내부에는 '효자 증 좌랑 달성서명보 지려' 정려비와 '효자비 증수기' 등을 볼 수 있었습니다.

No.133. ☞. 언제? 어디를? = 2026.07.10. 대구시 북구 조야로5길50에 위치한 원사재(遠思齋)(는)은 조선시대 및 근대 문중의 묘역과 함께 자리 잡고 있는 유서 깊은 영동 박씨의 재실이자 제향 공간으로, '화수정(花樹亭)'이라는 현판도 함께 걸려 있는 곳입니다.
역사적 인물과의 연관성 : 원사재 주변 샘골에는 대구 최초의 근대식 초등학교인 복명초등학교를 설립하고 육영사업을 펼친 독립운동가이자 자선사업가 김울산 여사의 묘소와 송덕비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No.134. ☞. 언제? 어디를? = 2026.07.11. 대구시 북구 동변로 24길 22-35에 위치한 금산재(琴山齋)(는)은 조선시대의 학자 퇴옹 조적(退翁 趙績) 선생의 묘각(묘를 수호하고 제사를 지내기 위해 지은 건물)입니다. (창녕 조씨(昌寧曺氏)는 시조인 조계룡(曺繼龍)이 신라 진평왕의 사위이자 용(비사벌가야 왕족)의 아들이라는 설화를 가지고 있어 왕족의 혈통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또한 중시조인 조겸(曺謙)은 고려 태조 왕건의 사위이기도 하여, 고려 시대부터 대표적인 명문 귀족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배향 인물 : 조적(趙績). 자는 중율(仲栗), 호는 퇴옹(退翁)입니다.
주요 이력 : 19세에 사마시(생원·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평생 성리학 연구에 매진한 인물입니다.
학문적 활동 : 영남 사림의 영수인 한훤당 김굉필(金宏弼) 선생을 스승으로 모시고 성리학 연구에 평생을 바쳤습니다. 추강 남효온의 《사우록(師友錄)》에 따르면, 조적 선생은 영민한 재주와 독실한 의행이 스승과 닮았으며, 중용과 대학의 진수를 깨우치고 명리(명예와 이익)에는 매우 담담했다고 전해집니다.
지리적 유래 : 금산재라는 명칭은 그가 묻힌 산소의 위치인 대구 북구 연경동 태봉(胎峰)의 서쪽 기슭 맥락과 관련이 깊습니다.

No.135. ☞. 언제? 어디를? = 2026.07.11. 대구시 북구 동변로24길 22-37에 위치한 표절사(表節祠)(는)은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능성구씨 문중의 인물인 구홍(具泓)의 뜻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사당입니다. 조선 선조 33년(1600년)에 그의 아들인 구회신이 건립하였습니다.
1600년이라면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처참한, 가장 대규모의 전란이었던 임진왜란의 혈흔이 아직 고스란히 남아 있던 시점이다. 따라서 표절사를 세운 구회신(具懷愼, 1564∼1634)이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이었으리라 추측하는 것이다.

☞.역사적 배경 및 특징
배향 인물 : 임진왜란 당시 의병 활동 등으로 충절을 지킨 구홍의 위패를 모시고 있습니다.
(구홍은 태조 이성계가 좌정승(左政丞) 벼슬을 제안하면서 세 차례나 불러도 끝내 거절했던 구홍의 대답이다. 그는 운명 전 후손들에게 ‘조선이 준 관직 이름으로 나를 부르지 말라’는 엄명을 내렸다. 새 왕조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었던 후손들은 명정(銘旌)에 ‘좌정승’이라 표기한다. 그러자 갑자기 날카로운 회오리바람이 솟구쳐 명정을 찢어 놓기를 세 차례, 결국 그는 영원한 고려의 ‘문하좌시중(門下左侍中)’으로 영면에 들었다.)

건립자 : 구홍의 아들이자 조선 중기의 인물인 구회신(1564~1634)이 아버지를 기리기 위해 지었습니다.
주변 시설 : 표절사 아래쪽에는 문중의 제사를 지내고 학문을 닦던 재실이 함께 위치해 있습니다.
지역적 가치 : 동변동과 서변동을 흐르는 동화천 유역의 대표적인 역사 유적 및 유교 문화재 중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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